자본시장법이 시행 반년을 맞았으나 투자은행(IBㆍInvestment Bank) 간판을 단 금융사는 아직 없다. 증권가는 골드만삭스 같은 세계적 투자은행으로 거듭날 수 있는 길을 열었다며 법 시행을 반겨 왔다. 해외 경쟁사처럼 IB 간판을 달고 선진 금융투자업무를 영위하게 될 것이란 기대가 존재했다. 정부도 자본시장법을 만든 취지를 언급할 때마다 이 점을 강조해 왔다.
그러나 투자은행이란 이름조차 쓸 수 없는 게 현실이다. 은행법 탓이다. 현행 은행법은 비은행 금융사에 대해 투자은행처럼 은행이란 단어를 조합한 상호를 쓸 수 없도록 하고 있다. 상표법도 발목을 잡긴 마찬가지다. 소비자가 업무영역을 식별하기 어려운 상호는 등록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외국 자동차 회사와 경쟁하려면 우리 기업도 모터스(Motors)란 이름을 써야 한다. 그런데 정부 생각은 다른 거 같다. 오히려 제약 수위를 더욱 높인 은행법 개정안이 정부 발의로 국회에 상정돼 있다. 2일 현재 국회 정무위원회에 계류된 개정안은 증권사를 포함한 비은행 금융사에 대해 뱅크(Bank)나 뱅킹(Banking)처럼 은행을 뜻하는 외국어마저 못 쓰게 했다. 투자은행을 영어로 쓴 IB도 안 된다는 것이다.
국내 증권사는 영문 상호로 시큐리티(Security)를 복수로 쓴 시큐리티즈(Securities)를 사용한다. 원래 안전이란 뜻이지만 복수로는 유가증권이 된다. 문제는 정작 영문 상호를 알려야 할 외국에선 이런 이름을 가진 회사가 드물다는 것이다. 영문 상호만 보고 보안업체냐 묻는 외국인까지 있을 정도다. 이는 소비자에게 혼란을 준다며 투자은행을 못 쓰게 한 상표법을 다시 생각케 하는 대목이다.
실제 정부가 증권사에 대해 투자은행이란 이름을 쓰는 것을 막은 사례도 있다. 아주경제가 최근 단독 확인했던 증권사는 회사 영문 이니셜과 투자은행을 조합한 이름으로 특허청에 상표등록신청을 냈다가 거절당했다. 역시 투자은행과 은행을 구별할 수 있는 식별력이 떨어진다는 게 이유였다. 이때 자본시장법 시행 당국인 금융위원회마저 은행법과 상표법을 이유로 똑같이 부정적인 입장을 내놨다.
문제는 이것만이 아니다. 정부는 번번이 증권업계 사기를 꺾고 있다. 원래 자본시장법은 금융업권간 칸막이를 없애 국제 금융시장에서 우리 경쟁력을 높이려고 했다. 하지만 비은행 금융사는 여전히 은행권으로부터 강한 견제를 받고 있다. 소액지급결제 서비스가 대표적인 예다. 자본시장법은 증권사도 이 서비스를 할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은행권이 금융결제원을 앞세워 진입장벽을 높인 탓에 일부 대형사만 제한적인 서비스를 하게 된 것이다.
자본시장법 시행으로 증권사도 투자은행업에 나서게 됐으나 은행법과 상표법은 바뀐 금융환경을 못 따라가고 있다. 투자은행과 똑같은 일을 하면서 여전히 옛 이름을 쓰게 한다면 국내ㆍ외 시장에도 혼란을 줄 것이다. 무조건 막는다고 능사는 아니다. 정부는 발목을 잡는 제약을 풀어주는 대신 부작용을 막을 안전장치를 따로 마련해야 한다.
조준영 기자 jjy@aj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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