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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흥 부국장 겸 산업부장 |
LG그룹은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당시 구본준 LG반도체 대표는 기자회견을 하면서 분루(憤淚)를 흘리고야 말았다. 그러나 당시 빅딜을 주도했던 이헌재 금감위원장은 "누가 진정한 승자인지는 아직 모르는 일"이라며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던졌다. 몇년 뒤 그의 말은 현실로 나타났다.
외환위기가 터지고 반도체가격 사이클이 하락곡선을 그으면서 빅딜의 결과는 현대그룹 전체를 유동성 위기로 몰아넣었다. 재계에선 그때 LG가 현대전자를 인수했다면 LG도 현대와 마찬가지 위기에 직면했을 것이란 평가를 하고 있다.
# 또다시 10년이 지난 지금 운명의 시계바늘은 '하이닉스 매각' 앞에 멈춰섰다. 자산규모 8조원인 효성이 16조원에 달하는 하이닉스를 인수하겠다고 나섰다가 결국 뜻을 접었다. '대통령의 사돈기업'이란 특혜시비에 휩싸이면서 10대그룹 진입을 향한 효성의 꿈은 사상누각이 되어 버렸다.
지난 12일 효성은 과거 LG와는 차원이 다른 또다른 분루를 삼키며 포기의사를 밝혔을 때 시장반응은 따뜻했다. 곤두박질 친 효성과 하이닉스 주가는 오히려 동반상승하면서 '포기'를 반기는 듯 했다.
효성의 하이닉스 인수시도는 처음부터 시장의 거센 저항에 직면했다. 효성 주식은 시장의 호평을 받던 주식이었다. 미래에셋자산운용이 사들인 10대 ‘황태자주’의 하나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효성이 하이닉스를 인수하려 하자 시장은 반발했다. 효성이 남의 돈을 빌려 배보다 배꼽이 큰 기업을 사냥(?)하겠다고 나섰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특혜시비론'은 고개를 들었다. 정치권은 물론 검찰과 언론까지 대통령의 사돈기업에 대한 도덕성 공격이 연일 계속됐다. 이런걸 보면 조선시대 왕비를 두고 ‘독이든 성배’라고 칭한 이유를 알만하다.
조선의 중전은 만백성의 어머니인 국모로 불렸지만 항상 '독이 든 성배'를 든듯 불안에 떠는 자리일 수밖에 없었다. 조선의 왕비 중 후궁이 아닌 중전은 37명에 달했지만 친아들이 왕위에 올라 대비가 된 경우는 12명에 불과했다. 정치 소용돌이 속에서 외척이 척살당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이번 사태를 보면 대통령의 사돈기업으로 마치 효성이 독이 든 성배를 들지 않았던가 하는 생각마저 해본다.
과거 대통령 사돈기업 중 선경이 이동통신 사업권을 획득했을 때도 정치공세가 거셌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임기 6개월을 남기고 이통사업을 추진하자 당시 김영삼 민자당 대통령 후보는 노 전 대통령이 사돈기업을 겨냥, 화살을 쏘았다. 결국 선경이 이통사업을 따냈지만 잡음이 일자 일주일만에 사업을 접은적이 있다. 이처럼 대통령 사돈기업이라는 자리는 어찌보면 독이든 성배를 든 조선조 왕비와 다를바 없다.
현재 효성은 하이닉스 인수 포기를 하고 억울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앞으로의 운명은 아무도 모른다. 과거 LG가 현대에 반도체사업을 빼앗겼을 때, 이헌재원장의 말을 다시 반추해볼 필요가 있다. 이미 시장은 효성의 결단에 환호를 보내고 있다. 시장은 무섭다. 시장의 논리를 거슬러 역주행해 성공한 기업은 거의 없다.
금호아시아나의 대우건설 포기와 한화그룹의 대우조선 포기만 보아도 알수 있다. 금호는 지난 2006년 대우건설을 무리하게 인수했다. 그러나 금융위기 한파로 결국 대우를 놓아야 했다. 한화 역시 시장의 반대를 무릅쓰고 대우조선을 인수하려 했다. 그러나 계약이행 보증금 3150억원까지 낸 상태에서 결국 포기했다.
과거에는 권력과 가까운 기업이 거대기업 인수를 통해 단숨에 거대그룹이 된 경우가 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시대가 아니다. 당시는 권력이 시장 위에 군림하던 시대였다.
그러나 이제는 시장이 군림하는 시대다. 변덕스럽기 짝이 없는 시장이지만 시장의 요구에 귀를 열어야 한다. 이것이 지금의 현주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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