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번 영화는 그를 왜 거장이라 부르고, 또 그렇게 밖에 부를 수 없는지를 고스란히 담았다. 신세대이기에 또 지금을 살아가는 세대에겐 짐짓 고루한 시선이자 그림이다. 하지만 임 감독은 자신이기에, 또 자신만이 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온 일을 이번 작품에 쏟았다.

우선 영화 제목을 보자. 제목이란 그 영화가 말하고픈 화두이자 목적이다. “달빛을 길어올린다?” 거장이 말하는 ‘달빛’과 그것을 길어 올리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영화는 한지에 대한 얘기다. 우리 고유의 문화유산이다. 하지만 지금은 잊혀진채 촌스럽고 멋없는 그것으로 치부된다. 영화 역시 비루하고 남루한 인물들의 삶 속에서 우리가 잊고 사는 것이 무언지, 또 그것에 대한 가치가 어떤 것인지를 다시금 반추한다.

먼저 달빛이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필용(박중훈)이 어둑한 골목길을 걸어간다. 휘엉청 하늘을 밝힌 달빛에 쳐진 필용의 어깨가 처연하다. 집안으로 들어서자 뇌졸중으로 몸을 쓰지 못하는 아내 효경(예지원)이 기다린다. 그는 아내에게 달빛을 구경시키려 세숫대야에 물을 담아온다. 물 위에 떠 있는 달빛. 눈에는 선하지만 잡을 수 없고, 잡지도 못하는 세속적 욕망이자 꿈이다.
그 꿈과 욕망을 벗 삼아 ‘천년 종이’ 한지를 만들어 내는 장인의 고집스런 손길은, 짐짓 세상의 눈으로부터 외면 받고 명맥이 끊길 위기에 처한 현실의 아이러니이자 비애일 것이다.
임 감독은 그 아련한 현실의 냉혹함을 달빛이란 서정적 미장센으로 중화시켜 나간다. 한지 역시 갖고 싶은 욕망이 있었고, 또 꿈도 가진 존재로서 인정받기를 원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를 위해 전직 지공예가이지만 현실에선 제 한 몸 가눌 수 없는 효경을 마치 한지의 또 다른 얼굴인양 바라본다. 때론 처연하게 또 한 편으로 슬픔 가득한 눈길로. 결국 영화가 말한 달빛은 한지 스스로가 잊혀져 가는 자신을 바라본 시선이자 슬픈 자화상이다.
하지만 임 감독은 그 슬픈 자화상을 단지 슬픔으로만 그려내지는 않았다. 영화 전체를 꿰뚫는 소재인 한지가 담은 방대한 정보와 그 얼굴을 보여주기 위해 수많은 고심을 했다고 한다. 결국 거장이 선택한 방법은 다큐멘터리적 한지의 속성에 극의 세밀함과 높낮이를 부여한 방식이었다.
이를 위해 영화의 큰 줄기인 필용과 효경 부부 외에 다큐멘터리 감독 지원(강수연)을 등장시켰다. 지원의 영화 속 시선과 카메라를 통해 영화의 분명한 목적인 한지의 미학 탐구에 시선을 배분한다. 물론 필용이 영화 속에서 진행하는 조선왕조실록 복원 사업도 같은 존재 이유를 가진다.

영화 말미이자 하이라이트에 등장하는 산 속 계곡신은 임 감독이 말하고픈 한지의 얼굴과 극의 화두이자 존재 가치인 ‘달빛’과 그것을 길어 올리는 모습이 오롯이 담겨 있다.
‘지천년’을 이어갈 명품 한지를 만들기 위해 산 속 계곡에 모인 필용과 한지 장인 그리고 지원과 효경은 달빛을 머금은 물 위에서 조금씩 그 모습을 드러내는 한지에게 넋을 빼앗긴다. 아니 빼앗긴 넋은 한지 때문이 아닌 달빛 아래 한지를 떠내는 장인의 손길에 닿아 있었을 것이다. 영화가 말하고픈 ‘길어 올린다’가 여기에 있는 듯 했다.

임권택 감독은 100편의 영화를 만든 장인답게 ‘한지’와 ‘인간’ 그리고 ‘삶’을 해탈의 경지까지 오른 혜안과 심안으로 평범하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게 그렸다. 2시간에 가까운 상영 시간 동안 웃음과 눈물 그리고 사랑과 질투, 여기에 시기까지 담아냈다.
여기에 숙성된 장맛처럼 우려낸 박중훈 강수연 예지원 등 베테랑 연기자들의 호연까지 더하니 두말할 나위 없다.
임 감독의 부인 채령씨와 그의 아들 외에 여러 유명 인사의 카메오 출연을 보는 재미는 영화 상영 중간 중간 쉼표처럼 웃음을 준다. 개봉은 오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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