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물어진 성벽의 속살은 벽을 쌓은 재료와 성벽의 축조 형태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여행 안내서를 보니 황토 흙으로 된 구간은 고대 서주 시대에 쌓은 것이었다. 성을 처음 쌓은 때가 서주 때인 BC 827년이었다면 핑야오 고성의 나이는 무려 2700년인 셈이었다.
좀더 떨어진 곳으로 가보니 내외벽 모두 검회색 벽돌을 구워 증축했다는 명청시대의 견고한 성벽이 나타났다. 내부를 채우고 있는 진흙은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는데 응집력을 높이기 위함인지 잘게 자른 볏짚과 자갈을 배합한 것이 눈낄을 끌었다.
핑야오 일대는 전국 시대 진(晉)과 조(趙)왕조때 부터 고을을 형성하기 시작했고. 진(秦)때에 와서 핑야오라는 이름을 얻게 됐다. 명나라때에는 핑야오 고성안에 현정부가 들어섰고 1370년에 성곽의 일부 구간을 개축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청조에 와서 핑야오는 진상을 주축으로 국제무역이 번성하고 근대금융이 싹을 틔웠다. 핑야오는 지금에 비유하자면 홍콩 상하이와 같은 곳이었던 셈이다. ‘상술의 달인’ 진상들은 중국의 베니스 상인이라는 별병으로 불렸다. 진상들은 소금과 실크 도자기 차 사업으로 돈을 모았다. 대표적인 진상 교가대원의 경우 두부와 식초 사업을 통해 전국 최대의 상단으로 발돋음했다.
19세기 산시성은 소금과 석탄 생산 및 무역으로 인해 중국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으로 소문이 날 정도였다. 청나라 말 허난 섬서(陝西) 푸젠성 일대의 빈민들을 서쪽으로 이주시켜 유산자로 육성한다는 정책이 나왔는데 이때도 산시는 부유한 성 중 하나로 꼽혀 대상에서 제외됐다.
산시성은 전국에서도 상단이 가장 많고 재정도 제일 튼튼한 도시였다. 핑야오는 바로 이런 산시성의 중심도시이자 상업과 금융활동의 본산과 같은 곳이었다. 핑야오는 ‘고대 중국의 월스트리트’라는 별명으로도 불린다. 바로 현대 은행의 시조격인 표호(票號)가 이곳에서 태동한 것을 두고 일겉는 말이다.
19세기에 등장한 표호는 지금의 은행과 같은 금융기관이다. 중국 봉건 후기 상업문화에 새 금융 체제가 결합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표호는 예금 결산 대출 송금 환어음 태환 업무를 취급했고 신용이라는 개념이 싹텄다. 표호 들은 전국에 지점을 두고 은과 금을 받아 보관한 뒤 종이 어음을 발행, 전국에 유통시켰다. 현금및 금은과 같은 재화를 수레로 운반하는데 따른 위험과 번거로움이 해소됨에 따라 신용을 기반으로 한 원거리 상업이 활발해졌다.
청 때 소유 경영이 분리된 표호만 전국에 51개 정도가 성업중이었고, 일부 표호는 미국 동남아 지역에 까지 지사를 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산시성 진상들이 설립한 표호는 전국에서도 유명세를 떨쳤고, 근대 금융의 발상지격인 핑야오에만 표호의 헤드쿼터가 20개나 몰려있었다.
핑야오에 있던 대표적인 표호는 일승창(日升昌)과 백천통(百川通) 등이다. 이중 특히 일승창은 19세기 청나라 재정을 흔들 정도로 세력이 막강한 표호였다. 지금도 일승창 표호 박물관에는 객실과 금고실 등이 그대로 남아 있고 진상들이 사용했던 주판과 금융 장부 등이 전시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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