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선씨가 지난 30일 제주시 문예회관 소극장에서 열린 ''4.3증언 본풀이 마당'에 나와 증언하고 있다. |
(제주=아주경제 강정태 기자) 비장한 열기가 소극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은발의 80대 할머니가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에 숨이 턱턱 막혔다.
그는 가느다란 목소리로 자신의 기억을 담담한 듯 끄집어내고 있었다. 그는 차분했지만 증언을 듣는 이들은 안타까움이 증폭되고 있었다.
지난 30일 제주시 문예회관 소극장에서 제주4.3 63주년을 맞아 열린 ‘4.3증언 본풀이 마당’의 한 장면이다.
이날 첫 증언자로 나선 박두선(88, 제주시 오라동)씨는 남편과 시아주버니에 대한 기억을 풀어냈다. 4.3이 끝난 후 일본에 가서 살다 지난 2005년에야 귀국했다는 그는 지금도 그 상처가 아물지 않은 듯 했다.
“여기서는 무서워 못 살고 일본으로 가는 밀항선을 탔어요. 남편은 고문 후유증을 앓았지만 돈이 없어 수술도 못 받고 탕약으로 버텼어요”
당시 그의 남편은 폭도로 몰려 경찰에 끌려갔다가 사흘 만에 풀려났다고 했다. 발은 묶어 거꾸로 매달려 혹독한 몽둥이찜질을 당한 후였다.
시아주버니(이영종, 당시 23세)에 대한 기억도 묻어 나왔다.
“장가라도 가서 아이라도 하나 있었으면 했는데”
최근 제주공항 유해발굴사업을 통해 신원이 확인된 시아주버니 이야기다. 경찰에 끌려갔다가 알뜨르비행장(제주공항)에서 처형당해 매장된 뒤 60여년을 땅 속에 갇혀 있었다고 했다.
그 후론 제주공항을 거치는 버스는 타지 않는다고 했다. “지금도 공항을 멀찍이 돌아서 가는 버스만 타요. 그쪽을 보기 싫어서요”
제주4.3은 한국전쟁 다음으로 인명피해가 많았던 비극적인 사건으로 꼽힌다. 지난 2000년에 들어서야 정부차원의 진상조사가 시작됐다.
4.3은 1948년 4월 3일 오전 2시께 350명의 무장대가 12개 경찰서와 우익단체들을 공격하면서 시작됐다. 남한단독정부 수립 반대 운동이 그 중심에 있었다. 이후 1954년 9월 21일까지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됐다.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위원장 김황식 국무총리)는 지난 1월 26일 4.3 희생자를 1만4033명, 유족 3만1255명으로 인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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