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조용성 특파원) 조남기(趙南起)장군은 1927년 충청북도 청원군 강내면에서 태어났다. 1938년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렀던 독립운동가 조부를 따라 중국 지린(吉林)성 옌지(延吉) 황지포로 이주했다. 일본이 패망하고 치안공백이 생기자 당시 18세의 조남기는 100여명의 청년을 모아 자위대를 만들었고, 이를 바탕으로 곧바로 공산당에 입당했다.
그는 소수민족으로서 중국에서 일을 하려면 중국어가 필수라고 생각해 군정대학에서 중국어공부를 집중적으로 했고, 한족 지식인에 버금가는 고급중국어 실력을 가다듬었다.
한국전쟁 때는 중국 인민지원군(중국이 한국전쟁 참전에 투입하는 해방군 병력을 통괄지휘하는 기구) 작전처 참모로 참전했다. 주로 북한과 중국 고위 관계자들이 회담할 때 통역을 하거나 사령부가 발령하는 작전명령서를 일선 부대에 직접 하달하는 일을 맡았다.
당시 마오쩌둥(毛澤東)의 아들인 마오안잉(毛岸英)과 함께 근무하기도 했다. 한국전쟁이 끝나자 박헌영 당시 북한 부수상이 “조국에서 함께 일하자”고 수차례 제안했지만 뿌리치고 중국에 남았다.
이후 그는 지린성 옌볜 군분구(軍分區) 정치위원장을 지냈다. 이어 문화대혁명으로 1968년부터 5년 동안 모든 관직에서 해임되었다가 1973년 퉁화(通化)군구 정치위원으로 복권된 뒤 지린성 군구 부정치위원, 옌볜자치주 제1서기, 지린성군구 정치위원, 인민해방군 총후근부 군수병참장비 총괄 부부장을 거친후 1987년 인민해방군 총후근부장에 올랐다. 2년후인 1988년에는 상장(우리나라의 대장)으로 진급했고 1997년 군에서 퇴역했다. 1998년 중국 정치협상회의 제9기 전국위원회에서 군부 대표로 부주석에 선출되었다.
조남기 장군은 중국의 전체 소수민족 가운데 최고 지위에 오른 경우며 중국내 조선족으로부터 ‘우상’으로 추앙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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