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삼국지 기행-1허베이편> 1-3 유비를 향한 변함없는 충의 노래 관우의 '풍우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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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2-03-01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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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우의 '풍우죽'


(아주경제 김현철 기자) '불사동군의, 단청독립명, 막혐고엽담, 종구불조령(不谢东君意 丹青独立名 莫嫌孤叶淡 终久不凋凌)'

“동군(조조)의 호의에 감사하지 않고 홀로 이름을 세우리. 다른 잎이 다 떨어지고 난 뒤 외로이 남은 나뭇잎(관우)을 미워하지 않기를. 끝끝내 시들어 떨어지지 않으리니.”
 
유비 삼 형제가 조조에게 패하고 흩어졌을 때, 유비의 부인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조조에게 투항했던 관우가 다시 유비에게 돌아가면서 유비에 대한 충의를 노래한 ‘풍우죽(風雨竹)'. 풍우죽은 만고의 충신이 노래한 세기의 충절가로 후세에 기억되고 있다.

삼의궁 관우전 앞에 세워져 있는 풍우죽 비석.


시에서 앞의 두 구절은 바람으로 인해 흔들리는 대나무 잎의 모습을, 뒤의 두 구절은 비에 축 쳐진 대나무 잎의 모습을 빗대 글자를 한자 한자 썼다 하여 풍우죽이라 불리게 됐다. 아무리 비바람이 불어도 대나무처럼 변하지 않고 충절을 지키겠다는 관우의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삼국지에 등장하는 인물 중 관우의 매니아라면 주군에 대한 충절의 의지가 적힌 이 비석을 한번이라도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 것이다. 하지만 실제 삼국지에는 풍우죽에 대한 내용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소설 삼국지 속에서 조조에게 얽매여 있던 관우가 유비에게 편지를 보냈다는 내용만 나와있을 뿐이고, 그것이 풍우죽이었음을 후대 사람들이 짐작할 따름이다.
 
 취재진은 허베이 지역에서 2개의 풍우죽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첫번째는 삼의궁에 마련된 관우전 앞에서 후대 사람들이 비석에 새겨놓은 것이다.  

 안내인은 풍우죽과 관련해 세가지 전설이 후대에 전해 내려오고 있다고 들려줬다.
 
 하나는 관우가 조조에 붙잡혀 있을 때 유비를 향한 충심을 대나무 잎에 숨겨 몰래 표현했다는 설, 또 하나는 관우가 조조에 붙잡혀 있을 당시 홀로 적적한 마음을 위로하고자 유비에 대한 충절을 노래했다는 설,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유비를 향한 흔들리지 않는 충심을 조조에게 보여주기 위해 썼다는 설이다.
 
 역사적인 사실 여부를 떠나 이 스무 글자로 쓰여진 시화(詩畵)를 바라보니 관우의 충성와 절개가 고스란히 전해지는 느낌이다.
 
 후대 사람들은 이러한 관우의 지조와 절개를 높이 사 풍우죽을 가로 104cm, 높이 65cm, 두께 6cm의 흰 비석에 새겼다.
 
 안내원은 “이 풍우죽 비석은 원•명나라 때 새긴 비석을 모방한 것”이라며 “관광객에게 보여주기 위한 전시용으로 새로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그 진품은 본래 삼의궁 내에 있었으며 문화대혁명 때도 훼손되지 않고 보존돼 왔다. 지금은 탁주 유적 문물보관소에 이전돼 보관되고 있었다. 우리는 그 탁본으로 진품의 존재를 확인할수 있었다.

탁주문물보관소에 이전돼 보관 중인 원명나라때 새긴 풍우죽 비석 탁본. 왼쪽은 바람으로 인해 흔들리는 대나무 잎의 모습을, 왼쪽은 비에 축 쳐진 대나무 잎의 모습을 표현해 아무리 비바람이 불어도 대나무처럼 변하지 않고 충절을 지키겠다는 관우의 의지를 표현했다.

두 번째 풍의죽 비석은 딩저우(定州)를 방문하던 중 우연히 만날수 있었다. 지역 주민에게 삼국지 무대에 대한 현장 취재를 왔다고 하자 “딩저우(定州)의 비석보관소에 가면 높이 230cm, 너비 30cm, 두께 25cm 의 비석에 새겨진 ‘풍우죽’을 볼 수 있다”고 말해 주었다. 이 비석은 청나라 때 딩저우 지역을 관할하던 현장이 관우를 찬미하는 비석을 새겨 제작한 것이라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
 
 딩저우(定州)의 비석보관소에 보관돼 있는 풍우죽 비석. 높이 230cm, 너비 30cm, 두께 25cm이다.

딩저우 비석보관소 관리인은 “현재 중국에 남아있는 풍우죽 비석은 모두 5개”라며 “허베이 줘저우, 딩저우, 상하이 쑹장(松江)현, 후베이(湖北) 샹양(襄陽), 산시(陝西) 시안(西安)에 있다”고 설명했다.
 
 
딩저우(定州)의 비석보관소에 보관돼 있는 풍우죽 비석. 높이 230cm, 너비 30cm, 두께 25cm이다.

이 중 딩저우, 시안, 쑹장에 있는 비석은 세로로 서있고, 나머지 탁주와 샹양에 있는 것은 가로로 눕혀있는 형태라고 그는 덧붙였다.
 
방방곡곡에 산재한 풍우죽 비석과 관우 사당은 중국인들의 지극한 관우 숭배를 짐작케하는 증거물들이다. 문화유적 파괴가 기승을 부렸던 문화대혁명때도 관우 사당만큼은 크게 훼손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삼국지에서 관우가 보여주는 초인적인 충의와 절개가 바로 중국인이 관우를 우러르는 이유일 것이다.

허베이성 한단시 전통 민간 도자기 자주요(磁州窯) 공예전문가가 만든 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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