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삼국지 기행7-산시성편>1-1 윈청 셰저우, “관우의 영혼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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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2-02-06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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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우의 영혼을 만나다



(아주경제 김희준 홍우리 기자) 김포공항을 출발해 중국 베이징(北京) 서우두(首都) 공항에서 비행기를 갈아타고 다시 1시간 가량 날아 산시(山西)성 타이위안(太原)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공항 대기실을 빠져나가자 후텁지근한 날씨에 석탄 냄새같은 매캐한 공기가 코끝에 와 닿았다.

공항에 마중나온 승용차에 몸을 실고 시내로 들어가는 도중 안내원은 우리 취재진에게 산시는 석탄의 고장이라며 중국 석탄 생산량의 3분의 2가 이곳에서 나온다고 설명했다. 조금 전 비행기 안에서 내려다 본 타이위안 주변의 커무튀튀한 잡석산들이 대부분 석탄광이었던 모양이다. 안내원은 오랫동안 많은 양의 석탄을 채굴한 탓에 지반이 약해져 산시성 지역에 고층 건물을 짓기가 쉽지않다고 소개했다.

밤 늦게 도착한 취재팀은 여독을 풀겸 첫날에는 호텔에서 휴식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이튿날 산시를 무대로 본격적인 ‘걸어서 삼국지 기행’ 취재를 시작했다. 우리의 이번 취재는 삼국지연의(이하 삼국지) 저자 나관중(羅貫中)의 고향인 산시성 일대를 돌아보는 것이다.

동시에 나관중의 삼국지에서 ‘만고의 충신’ ‘충절의 사표’‘난세의 영웅’으로 그려지는 관우의 발자취를 되새겨 보는 것 역시 산시 방문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었다. 타이위안시의 출근길 교통상황은 서울 못지않게 붐비고 복잡하다고 했다. 우리는 러시아워를 피해 이른 아침부터 발길을 재촉, 일차 목적지인 관제묘를 찾아 나섰다.

관우의 고향으로 확인된 윈청(運城)시는 산시성 성도(城都, 성의 중심지) 타이위안에서도 약 300km나 떨어진 곳에 있었다. 때이른 가을 빗길을 가로질러 시원하게 뚫린 고속도로를 5시간 가까이 내달리니 ‘셰저우(解州, 解를 ‘셰’로 발음) 관제묘’라는 표지판이 나타났다.

이정표를 보고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좁다란 골목길로 들어섰다. 좌우로 붉은 대문이 즐비한 길을 지나다 보니 붉은 색 피부와 무섭지만 영웅적 풍모를 한 관우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여기서 부터 비로 질퍽해진 비포장 흙길을 따라 다시 30여분 달려가니 관제묘(關帝廟)가 모습을 드러냈다.

관제묘 입구의 모습.


“9척 키에 긴 수염, 봉황의 눈, 누에 모양을 한 눈썹, 익은 홍시 같은 홍안(紅顔). 번쩍거리는 청룡언월도를 휘두르며 1장8척의 적토마를 탄 사나이”

나관중이 삼국지에서 묘사한 관우의 모습이다. 천민 출신의 ‘살인자’였던 관우는 주군이자 의형제인 유비를 만나 ‘명장’으로 다시 태어났고 오늘 날까지 충절의 표상으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삼국지 중 헤아릴 수없이 많은 캐릭터 가운데 초인적인 충의와 절개, 누구보다 용맹스럽고 무예가 빼어난 인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관우. 관우는 중국 역대 왕들의 통치이념에 부합하는 이미지로 사(死)후 관왕(關王), 또는 관제(關帝)로 추앙을 받았다. 때문에 중국 전역에 관우를 기리는 묘와 사당이 설립됐고, 그를 기리는 후대 사람들의 마음이 보태져 관우는 오늘 날 재물신으로 모셔지고 있다.

“관우의 수급은 허난(河南)성의 뤄양(洛陽), 몸은 푸젠(福建)성 당양(當陽)에 안장되어 있고, 이 곳에는 관우의 얼이 숨쉬고 있습니다. 관우 묘 가운데 규모가 제일 클 뿐만 아니라 보존 상태도 가장 좋죠” 입구에서 우리에게 셰저우 관제묘를 소개하는 안내원의 목소리에 자부심 탓인지 힘이 실려 있었다. 이 곳 관제묘는 수(隋) 왕조 시기 처음 지어진 뒤 송(宋) 명(明) 청(淸)대까지 이어지며 확장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안내원은 셰저우 관제묘가 크게 볼때 전전(前殿)과 후궁(後宮)으로 구분되는 등 그 구조가 중국 왕조의 궁궐과 완벽하게 일치한다고 설명했다.

관제묘안에 들어가니 제일 먼저 결의원(結義園)이라는 현판이 눈에 들어왔다. 결의원 안쪽에 자리잡은 결의정(結義亭)에는 1980년대의 유명한 시인인 왕국진(王國眞)이 썼다는 금테두리가 화려한 현판이 걸려있었다. 결의정 내부에는 유비 관우 장비가 형제의 뜻을 맺던 순간을 그린‘결의도(結義圖)’를 새겨넣은 석비가 자리잡고 있다. 세월이 흐른 탓에 다소 흐릿한 모습이었지만 도원결의를 둘러싼 역사적 진위여부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복사꽃잎이 흩날리는 복숭아 나무아래 결연한 표정의 세 영웅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결의원을 들어서 작은 석교(石橋)를 지나면 결의정이 나온다.


결의정 내부에 있는 결의도 비석.


결의정 안에는 또 관우가 살아생전 누빈 공간을 축소해 놓은 모형이 전시되어 있다.

결의원을 나와 좌우에 종루(鐘樓)와 고루(鼓樓)를 지나며 다수의 편액들이 눈에 띄었다. 이 곳에 와서 치성을 드린 후 소원을 이룬 사람들의 흔적이라고 한다. 명산대찰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고 싶은 심리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편액 문구들은 모두 관우의 위명(威名)을 기리는 것들로, 중국인들의 무한한 관우사랑이 느껴졌다.

외원을 한참 들어서면 드디어 단문(端門)이 나온다. 관제묘 내부로 들어가는 입구로, 문 좌우 위에 쓰인 ‘대의참천(大義參天)’과 ‘정충관일(精忠貫日)’ 네 글자가 관우를 설명해주고 있었다.

관제묘 내부로 들어가는 첫번째 문인 단문.


400년 전 청나라 때 지어진 단문은 모두 벽돌로 구성돼 있으며, 문 앞 좌우에는 새끼를 가진 암사자와 여의주를 쥔 숫사자 상이 있다.

단문 앞에는 우리나라의 하마비(下馬碑)와 비슷한 것이 세워져 있었다. 1m 남짓한 철기둥 세개를 교차해 놓은 당중(<手+當>衆)이란 것인데, 여기서부터 문무관은 각각 가마와 말에서 내려 걸어 들어가야 했다고 한다. 관우가 황제반열에 올랐으니그에 걸맞는 예를 갖추라는 뜻이다. 당중 또한 300년의 세월을 간직하고 있다.

단문 앞에 있는 당중의 모습.


단문과 당중 사이는 4마리의 용이 새겨진 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안내원은 “외부에서 들여다 볼 수 없도록 중국 궁궐 입구에는 이러한 벽이 세워진다”고 귀뜸했다. 재미있는 점은 이 벽에 새겨진 4마리의 용. 일반적으로 황궁(皇宮)에는 ‘구룡(九龍)’을 그려넣어 황제의 권위를 상징한다고 한다. 관우가 관제(關帝)로 추앙을 받는다고 하는데 그의 권위를 상징하는 비석에는 구룡이 아닌 네마리의 용만 그려진 이유가 자못 궁금해졌다.

단문 앞에 지어진 '사룡벽'의 모습.


단문을 들어서면 치문(雉門)이 나온다. 좌우, 중간에 각각 하나씩 문이 나있다. 동쪽 문은 문관, 서쪽문은 무관이 지나던 통로이며, 가운데 문은 황제만이 지날 수 있다고 한다.

청나라 강희황제가 이 곳을 찾았을 때 처음으로 가운데 문이 열렸다고 안내원이 귀띔했다.

단문과 치문(雉門)을 지나 오문(午門)에 들어섰다. 오문은 오직 황제의 궁에만 설치할 수 있다고 하니 관우에 대한 중국 고대 황제들의 지극한 정성과 경외심을 엿볼 수 있다.

오문을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좌우 벽에 관우와 생사를 함께한 주창과 요화의 그림이 눈에 띄었다. 그 뒤편 왼쪽 벽면에는 삼국지에 등장하는 관우의 스토리가 그림으로 남아 있었다.

다시 안쪽으로 들어가니 패방을 지나 어서루(御書樓)가 나왔다. 어서루의 천장은 팔각모양의 구멍이 나있어 팔괘루라고 불리기도 한다. 화재를 막고자 우물을 상징하는 팔괘 모양으로 천정을 만든 것이라고 한다.

어서루를 거쳐 관제가 집무를 보는 곳이라는 숭녕전(崇寧殿)으로 향했다.

숭녕전의 모습.


숭녕전 계단을 오르기 전 관우에게 향을 피워놓은 철탑이 보였다. 8.95m 높이의 철탑은 관우의 덕을 바라는 사람들이 피워둔 향으로 가득했다. 특히 철탑의 동그란 손잡이는 용접 등의 흔적 없이 매끈했는데, 당시 고도의 철 주조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숭녕전 앞에는 관우가 생전 청룡언월도를 갈았다고 하는 마도석(磨刀石)이 있었다. ‘큰 사람’이 썼던 물건답게 육중해 보이는 마도석 가운데에 날카로운 칼 자국이 눈에 띄었다. “관우가 칼을 갈고 잘 드는지 시험해 볼 때 남은 흔적”이라고 안내원은 소개했다. 금새라도 관우가 나타나 번쩍 거리는 청룡언월도를 휘두르며 떠나갈 듯 호탕한 웃음 소리를 낼 것 같았다.

관우가 청룡언월도를 갈았다는 마도석.


숭녕전 내에 자리잡은 관우상은 황제답게 용포(龍袍)를 걸치고 두 손에는 홀(笏)을 들고 있었다. 위풍당당한 표정의 관우를 사진에 담을 수 없어 안타까웠지만 그의 위엄이 오래동안 보존될 수 있기를 바라며 발걸음을 옮겼다.

숭녕전 내부에서 문턱을 넘어 첫 발을 딛게 되는 곳 즈음에는 ‘관우의 발자국’이 남아있었다. 사람의 발모양이라고는 믿기 힘든 거대한 흔적이었다. “왼발 같은데. 오른 쪽 발자국은 어디에 있어요?” 취재진의 질문에 “오른 발은 저 앞에 보이는 중탸오산(中條山) 근처에 가면 있어요” 안내원이 백미터도 넘은 앞쪽의 산을 가리키며 답했다.

숭녕전 앞 바닥에 남아있는 관우의 발자국.


“이 곳 관제묘 최고의 볼거리는 후궁에 해당하는 춘추루입니다” 각자 발을 대보느라 시간을 지체하던 취재팀을 재촉하며 안내원은 춘추루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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