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여황제 무측천의 황택사
황택사 입구의 전경. 황제(무측천)의 은택을 기리는 절이라는 뜻이다.
명월협의 웅장한 풍경을 뒤로 한채 2시간 남짓 달려서 도착한 이곳은 중국 유일의 여황제 무측천 사당인 황택사이다. 명월협에서 느꼈던 적막함과는 달리 황택사에 앞에 들어서니 도심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 이유 때문인지 사람들의 발길이 북적이고 활기가 느껴졌다. 몇몇 아이들은 황택사 앞에 넓게 펼쳐진 공간 앞에서 뜀박질을 하고 자전거를 타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가릉강의 큰 다리를 건너 강변 벼랑을 깎아 지은 황택사. 황택사는 원래 수(隋)나라 때에 건립되었다는데, 무후가 자신을 위한 사찰을 짓게 하면서 그 규모가 훨씬 커졌다고 한다.
“당나라 초에 이곳 이주도독 무사호의 아내가 양자강의 용과 교감하여 딸을 낳았는데 그녀가 바로 중국 유일의 여황제 무측천입니다. 그의 원찰로서 지은 것이 황택사로 그녀의 용모와 꼭 닮은 진용을 모신다고 하지요” 입구에서 마주하고 간단히 인사를 나눈 안내원 이렇게 설명했다.
이성전이라는 전각안에 들어서니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는 남녀의 상이 방안 중심에 자리잡고 있다. 이 두 성인은 당나라 고종과 그의 부인인 무측천이다.
“당태종이 황후가 죽자 미색으로 천하에 소문난 이 무사호의 14세난 딸을 궁에 불러 ‘무연’이란 아호를 내리고 곁에 앉혔습니다. 이후 태종이 죽자 황제의 여인인 후궁들은 전부 불교사원으로 출가하게 됩니다. 하지만 3대 황제 고종은 등극하자마자 태자 시절 자신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무측천의 미색을 잊지 못하고 절에 들어가 부왕의 애첩인 무측천을 데려와 후궁에 앉힙니다. 무측천은 이후 고종과의 사이에서 4남2녀를 낳고 치열한 궁중 쟁투를 통해 원래 황후였던 왕 황후까지 밀어내고 고종의 황후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안내원이 그녀가 황후에 자리에 올랐을 때 일화를 이렇게 설명해 준다.
“어느날 궁에서 그녀가 낳은 딸이 이불속에서 질식해 죽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하지만 이사건은 무측천이 왕 황후와 숙비에 누명을 씌우고 고종의 사랑을 독차지하기 위해 벌인 자작극이라는 설이 유력합니다. 이 사건을 빌미로 숙적인 두 여인을 죽이는데, 사지를 잘라 술독에 담가 죽였다는 소름돋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왕황후는 고통속에 죽어가면서 무측천을 향해 ”내세에 너는 쥐로 태어나고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 너의 목을 물어 뜯을 것이다“라고 외쳤답니다. 그후로 무측천은 이 원령에 시달려 궁안에서는 고양이를 기르지 못하도록 하고, 행차하는 곳마다 고양이 없애는 일에 우선하였으며 그의 진용을 모신 황택사 마저도 고양이를 기르지 않는 전통이 있습니다.” 천하에 공포 정치를 펼쳤던 무측천 이지만 한을 품은 원령 앞에선 두려움에 벌벌 떠는 한낮 여인네에 불과했다는 고사가 재미있다.
안내원의 이야기를 듣고 당고종 옆에 나란히 앉아있는 무측천의 모습을 자세히 살핀다. 그 자태가 너무나도 인자하고 근엄해 무측천이 생전 산천초목이 벌벌떠는 공포 정치를 펼쳤다고 하는 얘기가 실감이 나지 않는다. 오히려 광위안사람들은 무측천이 이곳 출신이라는 것에 대단한 자부심을 느낀다고 한다.
“고종이 죽고 무측천의 아들 4대 황제 문종이 대를 잇습니다. 하지만 문종의 황후. 즉, 문종의 처가 쪽에서 무측천과 대항해서 정권을 장악하려고 합니다. 이에 무측천은 이들을 모조리 잡아 죽이고는 문종을 폐위시켜버립니다. 5대 황제 예종 역시 무측천이 낳은 아들이자 문종의 동생입니다. 이곳저곳에서 무측천에 반대하는 반란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결국 무측천은 신속하게 사태를 진정시킨뒤 예종마저 폐위시키고 자신이 직접 황제의 자리에 오릅니다.”
무측천은 그 후 국호도 주(周)라고 바꾸고 자신이 직접 모든 정사를 관장한다. 그러나 무측천은 죽기 직전 자신의 후사가 대를 이으면 또다시 당나라가 되는 셈이라서 다시 국호를 당으로 바꾼뒤 황제의 자리도 아들이자 자신이 폐위 시켰던 문종에게 되돌려 주고 세상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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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고종과 나란히 앉은 무측천. 이들은 죽어서도 함께 묻혔는데, 그들의 무덤인 합장릉은 서안에 있는 건릉(乾陵)이다. |
“무측천은 권력계층에 대해서는 감시를 철저하게 해서 가히 공포정치를 했습니다. 정변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이런 독재정치를 통해서 사실 백성의 삶은 좋아졌습니다. 권력에 빌붙어 생명을 연명하는 계층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지만 그 권력과 무관한 백성에게는 훌륭한 국가지도자였던 것입니다. 그녀가 비록 권력에 눈이 멀고 숱한 염문을 뿌리며 방탕한 생활을 하기도 했지만 사찰을 많이 지었고, 불합리한 정치제도를 바꾸는데 힘쓴 지도자이기도 합니다.” 이대목에서 안내원의 목소리가 한껏 높아졌다.
안내원의 설명을 듣고 황택사에서 유유히 흐르는 가릉강을 바라다본다. 무측천이 태어난 날에는 온 동네의 여인들이 '여성의 날’을 맞이하여 이곳 가릉강에서 밤새도록 뱃놀이를 했다고 한다. 오랜 옛날부터 여성을 존중해 따로 명절을 만들어 준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여성의 권위를 남성과 동등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무측천. 중국 최초로 여성이라는 한계를 극복하고 정통으로 황제 자리에 앉았던 그녀의 모습에서 시대를 앞서갔던 여성 정치가의 비범함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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