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홍해연기자) 관우는 충의와 절개의 화신으로, 장비는 힘과 무예를 갖춘 장수로, 제갈공명은 지모(智謀)와 덕망(德望)을 겸비한 인물로 우리에게 친숙하지만 삼국시대 강대국이었던 위나라의 명장 장료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그리 많지 않다.
우리 취재팀 안내원은 허페이의 소요진 공원 입구에 동상으로 버티고 있는 장료에 대해 많은 것을 들려줬다.
"장료는 일찍부터 위(魏)의 옹립과 유지에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로서 7000명의 병사로 손권의 10만 대군을 무찌르며 용맹을 떨쳤지요." 안내원은 장료는 소요진 전투를 승리로 이끈 위나라 불후의 맹장이라고 소개했다.
장료의 자는 문원(文遠)으로 초년에는 정원(丁原)과 하진(何進), 동탁(董卓)과 여포(呂布)의 수하에 있었다. 훗날 조조가 여포를 제거하며 우두머리를 잃게 되자 장료는 조조에게 몸을 의탁하며 조조의 사람이 되었다.
일찍이 한나라 말, 조조와 원소가 대립구도를 이루고 있을 때 장료는 원소의 장수 장합(張郃)을 크게 격파한 것을 시작으로 장료는 군주 조조를 위한 전장에서의 삶을 살았다.
원소가 조조에 패한 이후 조조의 군대는 노국(魯國)의 각현(各縣)에 주둔하는데 수개월 간의 원정으로 군량이 바닥나 어쩔 수 없이 철수를 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이 때 장료는 적군 창희(昌希)의 군대 또한 갈 길을 잃고 우왕좌왕 하고 있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장료는 즉시 창희를 찾아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위군에 투항하라"고 설득했다. 이를 알게된 조조는 대국의 장수가 할 짓이 아니라며 장료의 결정을 꾸짖었지만 장료는 이 모든 것이 군주를 위한 것이라며 조조를 설득한다. 결국 조조의 허락을 얻은 장료는 계획을 실천해 불필요한 전쟁을 피했다.
원소의 두 아들 원담(袁譚) 원상(袁尙)이 패권을 다투며 조조를 위협할 때도 악진(樂進)과 함께 원담과 원상을 크게 이기며 조조의 이름을 드높였다. 이후 장료는 탕관(蕩冠) 장군으로 봉해졌다.
조조가 형주 평정에 나설 때 조조의 군대 내부는 혼란에 빠졌다. 이 틈을 타 진란(陳蘭)과 매성(梅成)이 반란을 일으켰고 손권과 동맹을 맺는 등 조조에 대항했다. 그러나 장료의 맹공을 진란과 매성은 당해낼 수가 없었고 결국 장료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노년에 이르러 병을 얻은 뒤에도 그의 용맹함은 적진을 떨게 하기에 충분했다. 소요진 전투에서 고배를 맛본 손권은 장료 말년에 다시 한번 허페이를 공격하는데 이 때 그의 장수들에 "장료가 노쇠하고 병에 걸렸다해도 쉽게 물리칠 수 없으니 신중해야 한다"고 당부했다고 삼국지 장료전은 기록하고 있다. 조조 사(死) 후에는 위나라 첫 황제에 오른 조비가 장료를 낙양궁전으로 불러들여 친히 그의 공로를 치하하기도 했다.
장료는 생을 마감하는 날까지 위나라의 안위와 전장을 염려했다. 허페이 삼국지 무대를 돌아보는 도중 이곳 주민들이 장료를 지혜와 충의를 갖춘 최고의 장수라며 강한 자부심을 갖는 이유가 이해될 법도 했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