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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림부두를 따라 한국의 매운탕집과 같은 요리집이 줄 늘어서 있다. 잡화도 같이 파는 한 가게의 주인 아주머니가 한국에서 온 취재단이라는 말에 포즈을 취했다. 넉넉한 미소가 참 인상적이다. |
이곳 여행은 이웃 츠비(赤壁) 시에서 시작한다.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적벽(赤壁)을 중심으로 당시 전쟁이 벌어진 것으로 알고 있지만, 실제 전투가 벌어진 곳이 바로 이곳 훙후 오림이다.
적벽 부두(우리 개념으로는 나루터 수준)에서 철선을 타고 하류로 20여분 내려가면 강 건너 오림 부두에 닿는다.
창장(長江·양쯔강)의 폭이 의외로 넓다. 아침 안개가 짙어 정확한 거리는 알 수 없지만 어림잡아 2km는 충분할 것 같다. 이곳 사람들도 창장은 안개와 흐린 날이 많아 제 모습을 보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대형 컨테이너선들이 쉴 새 없이 오르내리고 있다. 상하이에서 충칭까지 대형 물류 운송수단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한다. 중국인들이 창장을 ‘어머니의 젖줄’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알 만하다.
이곳 오림 부두부터 적벽대전의 숨겨진 전장 훙후 오림 전투가 펼쳐진 곳이다. 적벽이 승자 손권과 유비의 역사라면 훙후 오림은 철저하게 외면된 패자들의 역사다.
적벽을 찾는 관광객들도 대부분 스쳐지나가는 곳이다. 적벽이 발전하는 화려한 중국의 겉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라면 이곳은 잘 드러나지 않은 중국 농촌의 전형적인 속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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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권과 유비 연합군의 화공에 몰살을 당했던 조조군의 시신을 후대 사람들이 수습해 무덤을 만들었던 곳으로 지금은 백골총이라는 비석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
미리 말하지만 적벽대전 당시에는 이곳에서 수km 내륙까지 창장이었다고 한다. 1700년이라는 세월이 지나면서 물길이 바뀌어 인가가 들어서면서 마을이 형성됐다. 지금의 창장 물길도 1988년 대홍수 이후 대규모 관개시설 공사를 통해 새 모양을 갖췄다고 한다.
오림부두에서 좁은 시멘트 도로를 따라 10여분을 달리면 전형적인 중국 농촌마을에 닿는다. 적벽대전 당시 창장 변인 이곳은 83만 조조군의 주력군 진영으로,주유와 제갈량의 화공으로 인해 화염에 휩싸였던 주 전쟁터였다.
당시 조조 군사들의 처지는 참담했다. 불에 타고, 창에 찔리고, 화살에 맞고, 물에 빠져 죽은 자를 더하면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후대에 백골만 남은 수십만 조조군 시신을 수습한 곳으로 현재는 ‘백골총(白骨塚)’이라는 표석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당시 이곳에 조군의 시신이 떠내려와 강물을 막아 엄청난 홍수 피해를 입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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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군의 피로 창장을 붉게 물들였던 곳에 세워진 홍혈항 비석. 1997년 유적지로 지정됐으나 민가 가운데 비석만 남아있어 가이드 안내없이는 찾기도 힘들다. |
다행히 후세사람들이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겨 이 참혹한 전쟁터를 확인시켜 주고 있다.
魏吳爭鬪快雌雄(위오쟁투쾌자웅) 위와 오 자웅을 겨루던 곳
赤壁樓船一掃空(적벽루선일소공) 적벽에는 배 한 척 보이지 않네
烈火初張雲照海(열화초장운조해) 매서운 불길 구름을 찌를 듯 강물 비칠 때
周郞曾此破曹公(주랑회차파조공) 주랑은 여기서 조공을 깨뜨렸네
다시 좁은 농로를 따라 10여분을 차로 이동하면 오림채(烏林寨)라는 표석이 나온다.
이곳은 조조군 중 현재의 육군이 주둔하던 병영지라고 한다. 대부분의 지역이 얕은 구릉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당시 이곳은 평지로 조조군의 군영이 들어서기는 최적의 조건이었다고 한다.
지금도 이곳은 청동기 시대 유물부터 당시의 유물인 말안장, 칼, 창 등의 무기가 많이 출토되고 있다. 정부에서 적극적으로 유물회수 작업을 펼치고 있지만 민간 소장품들을 내놓지 않아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다.
적벽에 걸려 있는 이백, 두보, 두목 등 시인묵객의 적벽 관련 시들도 사실은 이곳에서 강너머 적벽을 바라보면서 지은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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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에서는 조조를 간웅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이곳 사람들은 조공사라는 사당을 지어 오히려 뛰어난 지략과 용맹함을 기리고 있다. |
마오쩌둥(毛澤東) 전 주석도 나라를 다스리는 정책과 용병술 등 조조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면서 존경하는 세 명 중 한명이 조조라고 밝힌 적이 있다. 최근에는 유비 중심의 편향적 삼국지의 해석에 반해 조조를 재평가하는 작업이 곳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이곳에는 기원전 200년 역사 흔적이 발견된 곳으로 현재의 건물은 대부분 후대에 새로 지었다. 삼국시대 유물로는 돌로 만든 향로가 남아있다. 당시의 군영답게 사당 안쪽으로 군사들이 드나들던 비밀통로의 흔적이 남아있다.(10여년이 넘게 이곳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는 안내원은 힘주어 당시 유물이라고 설명하지만 허술한 관리 상태를 볼 때 사실은 미덥지 않다.)
조조만(曹操灣)은 조조가 육군을 지휘하던 사령부가 위치한 곳이다. 지금은 농가와 연근을 키우는 연못으로 변했지만 당시에는 창장 변이었다. 후대에 수많은 시신과 당시의 전쟁 유물들이 발굴돼 이곳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정부는 역사적 고증을 거쳐 1992년부터 이곳을 삼국지 유적지로 지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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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인갱은 패전한 조조군이 화급하게 동료의 시신을 묻고 도주한 곳이다. 만인갱 비석 뒤쪽 연못 너머가 당시 조조의 도주로다. |
뒤로는 도교사원인 향산궁(香山宮)이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은 원래 종령암이 있던 곳으로 조조군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곳이라고 한다. 지금은 사라지고 현재의 향산궁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곳 정상은 해발 41m에 불과하지만 오림에서는 가장 높은 곳이다. 그 아래가 당시는 창장으로 조조군이 수군진영을 차린 곳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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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구이잉 훙후시 여유국 부국장 |
리구이잉 훙후시 여유국(관광청) 부국장은 요즘 정부 주도의 삼국지 테마 관광상품 개발로 한창 바쁘다고 한다. 특히 후베이성은 위·촉·오 삼국지의 주무대이기 때문이다. 적벽대전의 주 전쟁터인 훙후시의 삼국지 관련 관광에 대해 물어봤다.
- 적벽이 승자의 역사라면 훙후와 오림은 패자의 현장이다. 삼국지 관련 문화재 관리는.
“창장 건너 츠비시가 테마파크 건설 등 활발한 반면 이곳은 솔직히 아직 내세울만한 문화재가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곳은 원시 상태로 보면 됩니다. 앞으로 관광 상품으로 개발될 가능성은 무궁무진합니다.”
-관광인프라가 부족한데 특별한 홍보프로그램은 있는지.
“훙후와 오림은 아직 삼국지 관광 상품 홍보는 부족하지만 생태 관광지로 중국내에서는 유명한 곳입니다. 개발이 안 된 만큼 자연이 가장 잘 보존돼 있습니다. A4급 관광지만 두 곳이나 보유하고 있습니다. 오성급 등 호텔도 8곳이나 새로 생겼습니다.”
-삼국지와 관련한 개발 계획은.
“첫 번째 개발 사업으로 2008년 8월 오림 유황온천단지를 오픈해 국내외에서 연간 70만~80만 명의 관광객들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삼국지 관련 유적지 개발은 첫 번째 공정에만 약 6억위안을 투입돼 우한시를 중심으로 진행됐습니다. 이곳은 기본 개발계획만 확정됐지만 내년부터는 10억 위안이 투입될 예정입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아직까지 관광인프라가 많이 부족하고 해외 홍보를 하기에는 여력도 부족하지만 한국관광객들의 지속적인 관심과 방문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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