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 '걸어서 삼국지 기행 취재팀'이 호뢰관으로 향하는 도중 차안에서 정저우시의 관광안내원은 뜬금없는 귀신 얘기를 들려줬다. 밀레니엄이 두번가까이 지난 지금 이 귀신 이야기가 사실인지 여부는 증명할 도리가 없다. 아니 진위를 가려내는것 자체가 아무 중요한 일이 아닐지 모른다. 귓전으로 흘리듯 그냥 이야기를 듣다보니 관우에 가려진 비운의 장수, 화웅을 동정하는 호뢰관 일대 사람들의 마음이 가슴으로 전해지는 듯했다.
호뢰관은 역사상 낙양으로 가기 위한 중요한 관문 중의 하나로 삼국지 시대만이 아니라 역사상 많은 전투가 이 곳에서 벌어졌었다. 1800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아직도 사람들사이에 관우가 화웅을 벤 화웅참(華雄斬) 이야기가 회자되면서 호뢰관은 삼국지의 중요한 무대로 기억되고 있었다.
동탁(董卓)이 폭정을 일삼던 한나라말기 조조(曹操)는 각 지방 제후들에게 역적 동탁을 함께 치자는 격문을 띄운다. 그리고 18제후군들은 원소(袁紹)를 맹주로 연합해 동탁을 치기위해 진류(陳留)부근으로 모여 뤄양(洛陽, 낙양)으로 향한다. 하지만 낙양의 진출로 중 하나였던 호뢰관에서 연합군은 동탁의 수하인 맹장 화웅(華雄)과 맞딱뜨리게 된다.
화웅에 대한 기록은 많이 남아있지 않다. 단지 키가 9척에 달했고 큰 덩치에 험상궃은 얼굴로 많은 사람들이 공포에 떨었다는 말이 전해질 뿐이다.
연합군의 선봉으로 손견(孫堅)이 나서 첫 전투에서 그의 명성에 걸맞게 선전을 한다. 하지만 원술이 보급을 제 때 해주지 않아 손견은 화웅군에게 참패하게 된다.
달리는 차량안에서 호뢰관을 떠올리니 영웅호걸들이 한판 게임을 통해 천하를 다투었을 모습이 생생히 떠올랐다. 장수들의 칼과 창이 번득이고 진영의 병사들이 낙옆처럼 쓰러지면서 서서히 대지는 피로 물들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듯 치열하고 참혹했던 전장은 지금 자동차 도로와 채소밭, 평온한 민가로 변해있었다.
손견 패주이후 사기가 오른 화웅은 철기군을 이끌고 연합군의 진영 앞까지 진출한다. 이에 연합군 중 한복(韓福)의 수하인 반봉(潘鳳), 원술(袁術) 의 부장 유섭(兪涉)이 화웅을 잡겠다고 나섰지만 모두 화웅의 칼에 목숨을 잃고만다. 그 때 한 무장이 화웅의 목을 베어 오겠다고 자원하고 나섰으니 그가 바로 관우(關羽) 였다.
조조는 그의 용맹함을 흠모하며 따뜻한 술을 권했다. 하지만 그는 화웅을 베고 돌아와 마시겠다고 말하며 지체없이 말을 타고 출전한다. 그리고 곧 관우는 청룡언월도로 제후들이 두려워했던 화웅을 단칼에 베고 돌아와 그 술을 마신다.
그리고 그는 수세에 몰린 연합군을 구해내면서 삼국지의 무대에 화려하게 등장했다. 이에 미뤄봤을 때 호뢰관은 관우가 화웅을 베면서 삼국지의 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되는 장소라고 할 수 있다.
관우와 화웅의 옛 자취를 찾아 호뢰관으로 가는 여정은 취재팀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웅장한 옛 모습을 기대하며 아침일찍 차를 타고 정저우 시내에서 약 58km 떨어지 있는 싱양시(滎陽市)에 거의 다달았다. 호뢰관으로 향하는 길에는 큰 트럭들이 개미 행렬 처럼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정저우는 중국 교통의 요충지라 모든 물류가 이 곳을 통과하지요. 그 옛날 중국의 중심은 바로 이 곳 정저우였습니다”. 현지 안내원은 꼬리를 이은 차량행렬을 가르키며 이렇게 설명했다.
도중에 우리는 호뢰관을 안내해줄 싱양시 관계자들을 만나기 위해 잠시 차량을 멈춰세웠다. 멀리 엄청나게 큰 인물 조각상 3개가 보였다. 처음에는 삼국지 인물이려거니 여겼는데 아쉽게도 관계가 없었다. 안내원에 따르면 이 곳이 정씨가 생겨난 발원지라서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정씨삼공(鄭氏三公) 동상이라고 한다 곧 호뢰관으로 안내해 줄 여유국 관계자들을 만나 우리는 다시 차를 타고 호뢰관으로 향했다.
호뢰관으로 향하는 동안 현지 가이드는 호뢰관이란 지명의 유래에 대해서 설명해줬다.
“호뢰관이란 한자로 풀어쓰자면 호랑이를 가두는 우리입니다. 이는 기원전 11세기 주나라 목왕(穆王) 이 당시 이 곳에서 사냥을 했을 때 호랑이 한마리가 뛰쳐나왔는데 왕을 따르고 있던 근위부대 용사 고분융(高奔戎)이 호랑이를 사로잡아 바쳐 목왕이 이 호랑이를 우리에 가두어 기르도록 했습니다. 그 때부터 이곳이 호뢰관이라고 불리게 됐습니다”
“호뢰관은 훗날 황허(黃河), 앞에는 숭산(嵩山) 을 끼고 있는 배산임수의 지형으로 낙양으로 진출하는 전략적 요충지로 한나라가 세워지기 전 유방(劉邦)과 항우(項羽),가 이 곳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인 곳이기도 합니다”. 안내원의 설명은 이렇게 계속됐다.
정저우(鄭州) 시내에서 약 2시간쯤 지나 취재팀의 차량은 울퉁불퉁한 흙길을 지나 옛 호뢰관터에 도착했다. 호뢰관을 찾아가는 취재팀은 그 옛날 말발굽이 소리가 가득하고 무기 부딪히는 소리가 가득했던 장엄한 전투장면을 상상했지만 1800년의 세월을 거친 이곳은 고요하기 그지없는 조용한 시골마을이었다. 현지 주민의 오토바이 엔진 소리만이 허공을 가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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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난성(河南省) 싱양시(滎陽市) 쓰수이현(?水縣)에 위치한 호뢰관(虎牢關) 비석. 청나라 옹정(雍正) 9년(1731년)에 세워졌다. |
이 곳이 호뢰관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은 마을 입구에 세워져있는 비석 하나 뿐이였다. 문화재 보존을 위해 비석 주변에는 유리관이 씌워져 있었으며 추운 날씨 탓인지 유리에 이슬이 맺혀있었다. 호뢰관 안내책자에서 설명을 찾아보니 이 비석은 청나라 옹정 9년(1731년)에 세워졌다고 한다. 이 비석 하나가 덩그러니 1800년 전 화려한 호뢰관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었다.
안내원은 여포가 유비 관우 장비 삼형제의 협공에 도주한 길이라며 우리 취재팀을 숲길로 안내했다. 도착한 길은 생각보다 좁았고 주변은 흙산으로 둘러쌓여 있었다.
“ 당시 18제후군들은 이 곳 호뢰관에서 동탁군과 수많은 전투를 벌였지만 번번이 패했습니다. 하지만 관우가 화웅을 베고, 유관장 삼형제가 힘을 합쳐 여포를 몰아냈습니다. 그리고 연합군의 기세가 오르자 동탁군이 후퇴하면서 연합군은 낙양으로 진출할 수 있었습니다”
이 곳 주변을 둘러보니 특이하게도 흙산 밑에 토굴집을 짓고 사는 사람들이 보였다.
안내원은 “보기에는 허술해 보이지만 실제로 안에 들어가면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지요.” 라고 설명했다.
연합군과 동탁군이 싸움으로 함성소리와 말발굽 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던 당시에도 이 곳은 마을 사람들에게 삶의 터전이었을 것이다. 만약 소설 삼국지연의가 없었더라면 이 곳은 역사속에 묻힌채 그저 단순한 시골마을로 남아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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