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성훈(全星勳)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북한이 연내에 3차 핵실험을 단행할 것이라는 관측이 끊이지 않고 있다. 기술적인 준비는 끝낸 상태에서 정치적으로 시점을 저울질하고 있다는 것이 정부 당국의 판단이다. 사실 2012년은 북한이 핵실험을 통해서 핵보유국 지위를 굳힐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북한의 입장에서는 6자회담 참가국 가운데 네 나라(러시아, 중국, 미국, 한국)의 정권이 교체되는 금년에 핵과 미사일 실험을 포함한 도발을 감행하는 것이 가장 유리하다. 정권교체기의 네 나라가 국내정치에 몰입하는 만큼 북한의 도발에 기민하게 대응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우리 사회에서는 새로 출범한 김정은 정권이 앞으로 어떤 행보를 보일 것인가를 둘러싸고 혼선이 일고 있다. 갓 출범한 북한 정권이 지금 안정적인 상태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다양한 관측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북한의 중장기 대외·대남 전략에 대한 혼선은 대북정책을 둘러싼 국론통합을 저해하고 우리 사회의 남남갈등을 부추길 수 있기 때문에 국익 차원에서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대표적인 사례가 김정은 정권이 핵을 포기할 것인가를 둘러싼 논란이다. 국제사회를 기만하며 집요하게 핵을 개발한 북한이 김정일의 제일가는 업적으로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만든 것’을 꼽는 상황에서 핵을 자발적으로 포기할 리가 없다는 것이 대다수 국민들의 생각이다. 이는 우리 국민들이 20년 넘게 기대와 좌절을 반복하며 북핵 문제를 겪어오면서 북한 핵전략의 실체를 몸소 체험하고 자연스럽게 내린 건전한 판단이다. 국제사회의 대다수 전문가들도 다양한 분석을 토대로 김정은 정권이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북한이 핵을 포기할 수 있다고 믿으면서 그 근거로 김일성의 ‘비핵화 유훈’을 제시한다. 할아버지의 머리 모양까지 흉내내는 김정은인 만큼 정책도 답습할 것이라는 주장인 것이다. 더 나아가, 김정일의 핵보유국 유언과 김일성의 비핵화 유훈 사이에서 김정은이 갈등하고 있다는 그럴싸한 논리도 전개한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이런 주장은 김일성의 ‘비핵화 유훈’을 잘못 이해한 데서 오는 오판이다. 상식적으로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상반되는 유언을 남긴다는 것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김일성의 비핵화 유훈이란 지난 1990년대 초 남북기본합의서 협상 때 북한이 제기한 ‘조선반도의 비핵지대화’를 말한다. 당시 북한은 핵무기 탑재가 가능한 비행기·함선의 한반도 통과·착륙·방문 금지, 핵우산 보장조약 체결 금지, 핵무기 동원 군사훈련 금지 등을 요구했다. 이 기준에 따르면 미군의 한반도 출입은 물론 한·미 상호방위조약과 군사연습까지 금지된다. 즉 한·미 동맹의 와해가 ‘비핵지대화’의 핵심 목적이었다. 반면에 한국은 주한미군 문제는 남북간 논의사항이 아니라는 전제 하에, 남북한 쌍방의 핵무기 개발을 금지하는 ‘비핵화’를 제안했다.
1991년 12월 북한이 비핵지대화 주장을 접고 한국의 비핵화 제안을 받아들여 ‘비핵화 공동선언’에 합의한 것은 당시 동구 공산주의의 붕괴로 어려움에 처한 김일성이 남북대화에서 활로를 찾으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한은 비핵화 공동선언 체결 직후부터 다시 비핵지대화의 내용을 주장하기 시작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치적 난관을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 남한의 비핵화를 모자로 쓰긴 했지만 얼굴은 그대로 비핵지대화인 셈이다. 김정은이 김일성의 비핵화 유훈과 김정일의 핵보유국 유훈 사이에서 갈등한다는 견해는 모자만 바꿔 쓴 북한 핵전략의 실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오는 오류이다.
북한에 한·미 동맹 와해는 정권의 명운이 걸려 있는 문제이다. 북한식 흡수통일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가늠하는 관건이기 때문이다. 6자회담에서 북한이 한 일은 핵무기를 자산으로 ‘비핵화’란 기만전술을 사용하면서 한국과 미국을 흔든 것이다. 북한 정권에 비핵화는 수단일 뿐이지 목표는 아니다. 핵을 매개로 외세를 배격하고 한국을 압도해서 북한식 흡수통일을 실현하고 정권의 정당성을 되찾겠다는 것이 북한의 궁극적인 목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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