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회장은 기념사를 통해 "날로 치열해지는 국제 경쟁 속에서 우리가 살아남는 길은 우리의 인재들이, 그리고 인재들이 모인 기업이 세계 초일류로 성장해 5대양 6대주로 활동무대를 넓히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이후 수년간 삼성의 국제적 위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삼성은 여전히 소니 등 일본 기업을 열심히 모방하는 아류(亞流)에 불과했으며, 심지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본 기업으로 착각하는 국적불명의 기업이기도 했다.
위기를 느낀 이 회장은 1993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신경영을 선언하며 "국제화 시대에 변하지 않으면 영원히 2류가 될 뿐이며, 지금처럼 해봐야 1.5류에 불과하다"고 다시 한 번 일갈한다. 그해부터 삼성은 선진제품 비교전시회라는 행사를 1~2년에 한 번씩 비공개로 개최하기 시작했다. 세계 1등 제품과 삼성 제품의 기술력 차이를 확인하고 각오를 다지기 위한 행사다.
그로부터 2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난해 7월 개최된 선진제품 비교전시회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뀌었다. 과거 이 행사가 삼성의 부족한 부분을 평가하는 자리였다면, 지난해에는 삼성 제품이 경쟁사의 제품보다 어느 부분이 뛰어난지를 눈으로 확인하는 자리였다.
이 회장은 신경영에서 21세기 초일류 기업 실현을 위한 과제로 '국제화'를 제시했으며, 결국 삼성은 세계 1등이 됐다. 과거 삼성의 추격을 개의치 않았던 기업들도 최근에는 삼성의 모든 행보를 주목하고 있다. 삼성이 추진하는 글로벌 경영의 핵심은 단순히 삼성 제품을 소비자들에게 많이 파는 게 아니라 제품의 우수성을 인정받고 소비자의 마음을 얻는 데 있다.
지난 1998년 8월 외환위기에 직면한 러시아 정부는 대외채무 지불유예를 선언했다. 이후 많은 외국계 기업들이 러시아에서 썰물처럼 빠져나갔지만 삼성은 수천만 달러의 적자를 감수하면서도 러시아 시장을 포기하지 않았다. 러시아 국민들은 삼성을 신뢰하게 됐고, 이는 시장점유율 확대로 이어졌다. 삼성이 추구하는 국제화의 의미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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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삼성 위상을 전 세계에 각인시킨 세계 최고층 빌딩 두바이 '부르즈 칼리파' 전경. |
이듬해인 2005년 뉴욕타임스는 삼성이 10년 전 워크맨으로 세계 시장을 석권했던 소니를 제쳤다고 대서특필했다. 2004년부터 공사를 시작해 5년 만인 2009년 완공한 세계 최고층 건물인 '부르즈 칼리파'는 삼성의 기술력을 전 세계에 과시한 상징적인 구조물이다. 162층에 전체 높이가 828m에 달하는 이 건물은 동원 장비와 자재, 기술 등 각 부문에서 최고·최대·최장 기록을 새로 썼다.
삼성 관계자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인공구조물을 만들기 위해 그간의 경험과 기술력을 모두 쏟아부었다"며 "2009년 위용을 드러낸 부르즈 칼리파는 전 세계에 다시 한 번 삼성을 각인시키는 계기가 됐다"고 평가했다.
삼성이 글로벌 시장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내면서 삼성 특유의 오너 경영에 대한 평가도 달라지고 있다. 그룹의 역량을 모으고 적합한 인재를 투입하고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을 오너가 맡아 발전을 이뤄냈다는 것이다. 삼성은 더 이상 앞선 누군가를 따라가는 존재가 아니다. 도전을 통해 스스로의 한계를 경신하고 글로벌 시장의 새로운 트렌드를 제시하는 역할을 맡게 됐다.
이 회장은 올해 초 신년사를 통해 "기존의 틀을 깨고 오직 새로운 것만을 생각해야 한다"며 "실패는 삼성인에게 주어진 특권으로 생각하고 도전하고 또 도전하기를 당부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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