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아주중국> 걸어서 삼국지 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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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2-12-03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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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조, 인간미 넘치는 문학도

글 배인선·김현철 기자

허베이성 한단시 린장현 조조 업성박물관 공사현장.

갈석산(碣石山) 정상을 바로 눈앞에 두고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선선한 바람이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식혀 주니 가쁜 호흡도 가라앉는 듯 했다. 날씨도 맑고 화창하건만 사방을 둘러봐도 조조가 보았다던 창해(滄海)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후대 사람들이 조조가 남긴 시를 돌에 음각해 놓은 ‘관창해(觀滄海)’ 시 한 수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東臨碣石 以觀滄海(동림갈석 이관창해)
水何澹澹 山島竦峙(수하담담 산도송치)
樹木叢生 百草豐茂(수목총생 백초풍무)
秋風蕭瑟 洪波涌起(추풍소슬 홍파용기
日月之行 若出其中(일월지행 약출기중)
星漢燦爛 若出其裡(성한찬란 약출기리)
幸甚至哉 歌以詠志(행심지재 가이영지)
동쪽 갈석산에 올라 푸른 바다 바라보니
강물은 출렁이고 산과 섬이 우뚝 솟아있네.
수목이 울창하고 온갖 풀들은 무성하고
가을바람 소슬한데 큰 물결이 솟구치네.
갈마드는 해와 달이 그 속에서 나오는 듯
반짝이는 별과 은하 그 속에서 나오는 듯
아, 즐거움이 끝이 없도다! 이 마음을 노래하노라.


관도(官渡)대전, 창정(倉亭) 전투, 유성(柳城) 전투에서 원소군을 연이어 격퇴하며 승리를 거두고 하북을 차지한 조조는 허도로 돌아가기 위해 보하이(渤海)만 쪽으로 회군한다. 승전했지만 장기간 전쟁으로 지친 조조는 본거지로 빨리 복귀해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을 터. 하지만 조조는 서기 207년 회군 도중 갈석산에 올라 “동쪽 갈석산에 올라, 푸른 바다 바라보니”로 시작하는 그 유명한 ‘관창해’를 읊는다.

중국 베이징에서 세 시간가량 징선 고속도로를 타고 동쪽으로 250㎞쯤 달리면 허베이성의 친황다오(秦皇島)가 나온다. 보하이만에 닿아있는 허베이성의 항구도시 친황다오. 고대 진시황이 불로장생약을 찾으러 사람을 파견한 곳이라 하여 친황다오라 이름 지어졌다.

친황다오의 번화한 시내를 뒤로 하고 북서쪽으로 30㎞ 떨어진 창리현(昌黎縣)으로 향했다. 넓게 펼쳐진 평야 위를 한참을 달렸을까. 저 멀리 들판 위에 바위로 둘러싸인 채 우뚝 솟아 있는 갈석산이 시야에 들어온다.

안내원은 “이곳 주변 화북평야에는 갈석산처럼 높은 산은 찾아볼 수 없다”라며 “예로부터 갈석산은 저 멀리 보하이만을 지나가는 배들에게 방향을 알려주는 등대 역할을 해 왔다”라고 설명했다.

갈석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인 선대정(仙臺頂)은 해발 695m로 별로 높지 않다. 그러나 산 곳곳에 노출된 암벽이 말해주듯 온통 바위투성이고 꽤나 가파른 암벽산이다. 높이만 들었을 때는 동네 뒷산 정도의 야산(野山)이지만, 직접 보니 등산객들 사이에서 악산(惡山)이라 불리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무리 천하무적의 조조라지만 이렇게 깎아지를 듯 가파른 암벽산을 약 1800년 전 그 수많은 마차와 군사들을 이끌고 어찌 올랐을까.

갈석산 관리국 왕 국장은 “갈석산은 앞쪽은 가파르고 뒤쪽은 완만하다”라며 “아마도 조조는 뒤편으로 난 길을 따라 산에 올랐을 것으로 후대 사람들은 추측하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갈석산 뒤편에는 십리포(十里鋪),오리영(五里營) 등 과거 조조 군대가 주둔했다고 하여 이름 붙여진 마을이 여러 군데 자리 잡고 있다.

단단히 채비를 하고 드디어 갈석산 등반길에 올랐다. 실제로 조조가 올랐다는 산 뒤쪽보다는 가파른 앞쪽 길을 택했다.

등산로 입구에 도달하자 ‘신이 내린 갈석산은 바다를 바라보는 명승지. 아홉 명의 임금은 이곳에 올라 천고의 수수께끼를 어찌 풀었을까(神岳碣石, 觀海勝地, 九帝登臨, 千古之謎何解)’라는 문구가 보인다. ‘도대체 역대 제왕들은 왜 이곳에 힘들게 올랐을까?’라는 수수께끼를 풀어보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갈석산 정상을 향해 힘찬 발걸음을 내디뎠다.

산기슭에 다다르자 계단 너머로 어디에선가 청아한 목탁 소리와 함께 경전 읽는 소리가 들려온다. 목탁 소리를 따라 발길을 옮기니 1,0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수암사(水巖寺)가 자리 잡고 있다. ‘물과 바위가 어우러진 절’이라는 이름의 수암사는 뒤로는 장대한 갈석산을 병풍 삼고 앞으로는 갈양호(碣陽湖), 더 나아가 저 멀리 베이다이허(北戴河)와 보하이만까지 펼쳐져 있으니 풍수지리적으로 최적의 입지를 자랑한다.

수암사는 중국 불교문화 전파의 대표적인 사찰이다. 당나라 때 건설한 이후 수차례 보수를 거쳐 왔으나 지난 1976년 탕산(唐山) 대지진 당시 훼손돼 90년대 다시 재건됐다고 한다. 이곳에는 지난 1954년 여름 친황다오를 방문한 마오쩌둥(毛澤東) 전 주석이 베이다이허를 바라보고 조조의 ‘관창해’를 생각하며 지었다는 ‘낭도사(浪淘沙)’를 새겨 놓은 바위도 있다. 아래는 시구의 일부분이다.

往事月千年(왕사월천년)
魏武揮鞭(위무휘변)
東臨碣石有遺篇(동림갈석유유편)
蕭瑟秋風今又是(소슬추풍금우시)
換了人間(환료인간)
천 여년 전
위 무제 조조가 말을 타고
동쪽의 갈석산에 올라 시 한 수를 읆었네.
당시 스산한 가을바람은 여전히 불고 있으나
세상은 상전벽해로 변했네.

갈석산(碣石山) 정상 길목의 거대한 바위에 새겨진 조조의 시 '관창해'

당시 마오쩌둥은 “조조는 대단한 정치가, 군사가이자 대단한 시인이기도 하다”라고 격찬했다고 전해진다.

50여 년 전 마오쩌둥은 이미 조조를 역대 제왕과 견주어 손색이 없다고 극찬하며 조조를 역대 제왕 중 가장 높은 반열에 올려놓았다. 중국 내 조조에 대한 재평가는 어찌 보면 마오쩌둥으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암사를 나오자 본격적으로 가파른 돌계단이 눈앞에 이어졌다. 등산길 주변 곳곳에 기송괴암(奇松怪巖)이 눈에 띄니 저절로 발걸음이 멈춰진다. 특히 산이 온통 절벽과 바위로 이뤄져 있으니 바위 틈바구니에 자라나는 소나무들이 많다. 누워 있거나 대롱대롱 매달려 있거나 옆으로 휘어지거나 자라는 모습도 형형색색이다.

입구에서 우리를 반갑게 맞이한 ‘영객송(迎客松)’에서부터 당태종이 이곳에서 시를 쓰고 버린 붓에서 줄기가 나와 자랐다는 ‘척필송(擲筆松)’, 한 소나무에서 두 개의 가지가 나란히 자라 연인의 사랑을 기원한다는 ‘정려송(情侣松)’까지 이름 하나하나에 담긴 스토리를 들으니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바위 곳곳에 붉은 글씨로 새겨진 문구도 참으로 흥미롭다. 신선이 하늘을 가리키고 있다는 ‘선인지천(仙人指天)’, 하늘에서 날아온 돌이라는 ‘비래석(飛來石)’, 바다를 바라보는 거북이라는 해조귀금(海眺龜金), 바위에 오르니 옷깃이 천리를 휘날린다는 ‘진의천인(振衣千仞)’ 바위에 기대어 휘파람을 분다는 ‘빙관일소(凭觀一嘯)’ 등등. 참으로 기상천외한 발상이 아닌가.

산 중턱쯤 올랐을까. 붉은 색으로 ‘갈석(碣石)’이라는 두 글자가 바위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가로 세로 크기가 각각 1m는 될 만한 거대한 글씨다.

올랐다 쉬었다 하길 여러 번. 그렇게 두 시간쯤 지났을까. ‘관창해’를 음각해 놓은 바위를 바라볼 수 있는 ‘갈석관해’에 이르렀다. 갈석관해에 올라 올라온 방향을 돌아보니 저 멀리 왼쪽 편에는 북쪽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연산산맥(燕山山脈) 자락이 끝나고 있고, 눈앞으로는 갈석산 능선이 감싸 안은 계곡과 갈양호(碣陽湖)가 보인다. 그 건너편에 창리현 읍내가 펼쳐져 있다.

안내원은 “조조가 보았다던 창해는 갈석산에서 15㎞ 떨어져 있는데 요즘은 잘 보이지 않는다”라고 설명했다. 지금은 비록 이렇게 좋은 날씨에도 창해를 볼 수 없지만 1,800여 년 전 이곳에 올랐던 조조는 분명 역대 제왕의 기운을 받은 듯 가슴 벅차 오르는 마음으로 관창해를 읊었으리라.

당시 조조만큼 가슴 벅찬 감동은 느낄 수 없었지만 바위에 붉은 글씨로 새겨진 ‘관창해’라는 시를 바라보며 그 아쉬움을 달랬다. 쉰여섯 글자로 이뤄진 시 한 수가 과거 조조의 숨결을 조금이나마 느끼려고 이 산에 오르는 방문객들을 환영하며 조조의 섬세하면서도 여린 감성을 전해주는 듯하다.

앞서 중국의 진시황과 한 무제가 발자취를 남기고 간 이곳 갈석산. 두 황제는 조조가 갈석산에 오르기 한참 전에 이곳에 올랐다고 전해진다. 중국 최초로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은 이곳에 올라 동쪽 바다를 바라보며 불로장생을 꿈꿨다. 한 무제 역시 이곳에 올라 영생을 기도했다.

누구보다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싶었던 조조도 갈석산에 올라 개선가를 한 수 읊음으로써 자신이 중국의 역대 황제와 동등한 위치에 올랐음을 과시하고 싶었을 것이다. 중원과 허베이를 통일하며 천하를 손에 거머쥔 조조가 역대 두 제왕이 오른 갈석산에 등정해 그들과 같이 천하를 내려다 본 것은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행보였다. 그리하여 조조는 무리해서라도 갈석산에 올라 두 제왕의 기상을 이어받고 그 명분을 채워야 했다. 다만 그들보다 현실적이었던 조조는 허황되게 영생을 빌지않고 승전의 기쁨을 갈석산에서 기념하고 싶었으리라.

갈석산 바위에 선명하게 새겨진 '갈석(碣石)'이라는 두 글자.

역대 내로라하는 제왕들이 잇따라 갈석산에 오르니 당시 이곳이 황제들 사이에서 ‘신악갈산(神岳碣山)’으로 불리며 유명세를 탔던 것일까. 조조 이후에도 수 양제와 당 태종 등 6명의 제왕이 이어 갈석산에 올라 제왕의 기운을 얻고자 했다. 평야 지대에 유독 돌로 만들어진 산 하나가 우뚝하니 솟아 있고, 그 위에 오르면 보하이만을 굽어 볼 수 있으니 제왕으로써 위압감과 신비감을 더했으리라 후대 사람들은 가히 짐작한다.

흥미로운 점은 갈석산이 옛 고구려와도 꽤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늘이 고구려의 편이었을까. 고구려를 정벌하러 가던 길에 이곳 갈석산에 올라 역대 제왕에게 승리를 빌었던 수 양제와 당 태종은 모두 고구려에 처절하게 대패했다.

반면 위나라 사마의는 요동의 공손연을 토벌하러 가던 중 갈석산에 올랐고 결국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 그리고 그 승리는 바로 고구려의 기마병과 펼친 연합 전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전해진다. 갈석산이 중국의 역사뿐만 아니라 고구려의 혼과도 맞닿은 곳이라 생각하니, 턱까지 차오른 숨만큼이나 가슴이 벅차올랐다.

삼국지, 불멸의 역사로 부활하다.
“유비는 제갈량의 오두막을 세 번이나 찾아가 간청하여 드디어 제갈량을 군사로 맞아들이게 된다.”

중국 허베이 친황다오에서 이동을 위해 택시를 탔을 때 일이다. 때마침 라디오 프로그램에서는 『삼국지연의』의 ‘삼고초려’ 부분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기사님. 삼국지 좋아하세요?”
“그럼요. 중국인이라면 남녀노소 다 알고 있는 게 삼국지 아니겠어요? 매일 저녁 운전하면서 틈틈이 삼국지 방송을 듣는답니다.”

삼국지 인물 중 누구를 가장 좋아하냐는 물음에 그는 주저없이 제갈량을 꼽았다. 똑똑하고 총명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중국인들에게 삼국지에 관해 물어보면 입에서 술술 삼국지 이야기가 흘러나오는 것은 기본이다. 삼국지가 중국인들의 삶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음은 일상생활 속에서 이야기하는 속담에서도 어김없이 드러났다.

‘삼국지를 세 번 읽은 사람과는 논쟁하지 말라(三國看三遍 此人不可交)’, ‘젊어서는 수호지를 읽지 말고 늙어서는 삼국지를 읽지 말라(少不看水滸 老不看三國)’라는 말이 대표적인 예다. 삼국지를 읽으면 읽을수록 영악해지고 잔꾀가 많아지기 때문에 이런 말까지 나온 것이다.

취재진은 허베이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중국, 특히 허베이에 불고 있는 삼국지 열풍을 느낄 수 있었다. 도원결의에서 이름을 따온 ‘결의로’, ‘도원반점’, 장비의 이름을 딴 술 ‘장비연’, 조자룡의 이름을 딴 ‘조운교’, ‘자룡광장’ 등 거리 곳곳에서 삼국지에 나오는 인물이나 지명을 딴 가게 이름이나 도로, 상품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1800여 년의 오랜 시간이 지난 탓일까. 허베이에 있는 삼국지 관련 유적지들은 마치 권력의 덧없음과 세월의 무상함을 말해주듯 삼국지의 명성에 비해 대체적으로 허술하게 보존돼 있었다.

이제는 그 흔적만 간신히 남아있는 유비나 조자룡의 생가, 장비의 사당에 세워진 두 동강 난 옛 비석들, 화려했던 옛 제왕의 성은 형장의 이슬처럼 사라진 채 옥수수만 무성하게 자라나 쓸쓸함 저 느껴지는 조조의 업성 유적지, 초라하게 무덤만 남아있다는 원소의 옛 무덤 등.

삼국지에 나오는 그 이야기 속의 현장들은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린 듯하다. 다행인 것은 이제라도 허베이에 삼국지 유적 살리기 열풍이 불면서 과거 흔적을 복원해내려는 노력이 곳곳에서 펼쳐지고 있다는 점이다.

첸쉐주(千學柱) 줘저우시 여유국 부국장은 “현재 유비 생가의 옛 자리에 다시 고택을 복원하고 있다”라며 “다음 번에 올 때는 분명 유비의 생가를 돌아볼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은 조조 천년 고도의 옛터만이 황량한 벌판 위에 자리 잡고 있는 한단시 린장현 업성 유적지 역시 마찬가지다. 조조 업성 박물관 오픈을 눈앞에 두고 있는 데다 조만간 유적지와 박물관 등을 연계해 삼국지 테마파크까지 건설 계획 중에 있다.

실제로 린장현 여유국 관계자는 “허베이성 전체적으로 삼국지 유전발굴 및 보존에 힘쓰고 있다”라며 “향후 삼국지를 사랑하는 국내외 관광객들이 허베이성 곳곳에 자리 잡은 삼국지 유적에 찾아오길 바란다”라는 기대를 나타냈다.

1800년 전 삼국지 영웅호걸들이 용쟁호투를 벌였을 그 역사의 현장을 복원이 끝난 몇 년 뒤 다시 찾았을 때 지금과는 또 다른 새로운 분위기를 맞볼 수 있게 되길 바라며 ‘걸어서 삼국지 기행’ 취재진은 정든 허베이성 일대 삼국지 무대와의 작별을 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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