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중국역사> 난징대학살로 중국인 30만명 희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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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3-12-08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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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경제 한오종 기자 =

▲ 12월11일(수) - 1911년, 미사일의 아버지 첸쉐썬 출생

말년의 천쉐썬의 모습. 그는 반세기 동안 중국의 우주개발, 미사일 개발에 큰 기여를 했다.


중국의 ‘우주비행의 아버지(航天之父)’, ‘미사일의 왕(火箭之王)’ 첸쉐썬(錢學森)이 상하이(上海)에서 태어났다.

그는 북경사범대 부속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졸업한 뒤 교통(交通)대학 기계공정계에 입학했다.교통대학을 졸업한 뒤 칭화(凊華)대학의 미국 유학 프로그램에 따라 1935년 메사츄세츠 공대를 거쳐 캘리포니아 공대에서 항공 및 수학박사 학위를 취득한다.

그는 제 2차 세계대전 때 미국 국방과학위원회 미사일조에서 근무하였고 전후 미국대령으로서 독일 미사일 설비조사대에서 책임자로 일하는 등 관련 분야에 종사를 하고, 미국 지대지 탄도 미사일 및 우주탐사 로켓에 이론적 기초를 마련한 여러 논문을 저술한다.

1955년 중국으로 돌아와 중국과학원을 창설, 소장으로 있으면서 중국의 로켓 개발연구를 지도하였다. 특히 중국 최초의 인공위성 개발에 참여 1970년 4월에 첫 위성 ‘동팡홍(東方紅)’을 발사했다. 이 성과는 2003년 유인우주선 발사에까지 이어지고 그는 반세기에 걸쳐 애국한 최고의 과학자로 추앙받고 있다.

이후 2009년 10월31일 향년 98세로 타개했다. 그러나 55년 그의 귀국 목적을 두고 서양 언론에서 ‘미국 국적 신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귀국한 것이다’라는 주장이 제기되어 그의 애국주의 이미지에 큰 상처를 남기기도 했다.


▲ 12월11일(수) - 2001년, 중국 WTO 공식 가입

2001년11월11일 도하에서 열린 WTO각료회의에서 중국측 대표가 가입문서에 서명하고 있다.


중국은 이날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한 143번째 국가가 되었다. 1986년 가입신청 이후 15년 간의 긴 협상 끝에 2001년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각료회의에서 정식 가입이 되었다. 이로써 중국경제의 세계경제로의 통합이 가속화되었다.


▲ 12월12월(목) - 1936년, 시안사변으로 제2차 국공합작 결성

시안사변의 주모자인 장쉐량(좌)과 양후청(우)



동북군(東北軍)의 장쉐량(張學良)과 17로군의 양후청(楊虎城)이 산시(陝西)와 간쑤(甘肅)성 일대의 공산당군 토벌을 독려하기 위해 시안(西安)에 온 장제스(蔣介石)일행을 연금했다.

이 둘은 공산당과 연합해 항일 운동을 전개할 것을 장제스에게 수차례 요구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극단적 행동에 나선 것이다.

12월 7일 장쉐량은 화청지(華淸池)에 머무르고 있던 장제스를 찾아가 내전을 정지하고 일본과 싸울 것을 건의했으나 장제스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틀 뒤, 장쉐량은 시위대 앞에서 시안사변을 일으킬 결심을 은연중에 시사했고, 마침내 12일 장제스를 화청지에 연금하는 시안사변을 일으킨다. 이로인해 제2차 국공합작이 성립된다.

이후 시안사변을 주도했던 장쉐량은 사형을 받고 감형된 후 대만으로 철수한 이후에도 연금된 생활을 하다가 장제스의 아들이 사망한 이후(1988년)에야 풀려나게 된다. 장제스의 석방에 강경히 반대하고 그를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양후청은 국민정부가 대만으로 철수하기 전 비밀리에 처형된다.

한편 장쉐량은 장제스 말년에 시계를 선물했다고 한다. 장제스는 이에 낚시대로 화답했다고 한다. 즉, ‘이제 시간이 다 된 것 아니냐’는 장쉐량의 요청에 ‘계속 낚시나 하게’로 답변한 것이다.



▲ 12월13일(금) - 1937년, 난징대학살로 30만명 학살

난징대학살의 참혹한 모습. 한 일본군이 중국인들의 머리를 쌓아두고 자신의 '전공'을 자랑하고 있다.


1937년 12월 13일 일본 침략군에 의해 중국 국민정부의 수도 난징(南京)이 함락됐다. 이날부터 일본인들의 전쟁범죄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는 ‘난징 대학살’이 시작되었다.

1946년 도쿄(東京) 국제군사재판에는 일본군의 난징 점령 후 6주 동안 약 34만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했다는 통계가 제출되었다. 규모도 규모지만 학살이 진행되는 동안 일본군은 인간의 잔인성과 야만성이 어디까지 이를 수 있는가를 보여주었다.

두 명의 일본군은 공개적으로 누가 먼저 100명의 중국인의 목을 베느냐의 시합을 벌여 이틀 동안에 각각 105명과 106명의 무고한 중국인을 살해했다. 놀라운 사실은 이 야만적 행동이 당사자의 사진 얼굴과 함께 일본 언론에 ‘전공(戰功)’으로 보도되었다는 점이다. 비공개 시합에서는 최고 300명의 중국인의 목을 벤 일본군도 있었다고 한다.

일본군은 희생자들의 몸에 휘발류를 끼얹고 총으로 쏘아 불에 태워 죽임으로써 피해자의 고통을 가중시키는 일을 즐겼는가 하면 어린아이들을 공중에 던져 총검으로 받아 꽂아 죽이는 일도 그들의 오락이었다. 생매장에다 살아 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사격훈련, 총검술 훈련 등을 감행했다. 살해하기 전에 눈알을 뽑고 귀를 잘라내는 일은 부지기수였다.


▲ 12월14월(토) - 1994년, 싼샤댐 기공식 열려

양쯔강 싼샤(三峽)댐 기공식이 거행됐다. 이 역사를 주도한 리펑(李鵬) 총리는 ‘공은 당대에 이익은 천년을 간다(功在當代利千秋)’라는 축사를 했다.

리펑이 밝힌 바에 따르면 싼샤 댐 공사는 40년간 타당성 조사가 있었으며 공사준비는 1993년부터 시작되었다. 1997년 양쯔강 물줄기를 돌리고 2003년 첫 발전을 시작한 뒤 2009년에 공사를 마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싼샤댐은 담수시작 이후 환경적 재앙을 가져 올 것이라는 주장에 끊임없이 제기되었으며 이 때문에 2006년 5월 20일 댐 본체 기념식도 조촐하게 치러졌다. 싼샤댐으로 수많은 문화재 역시 소실되었고, 지난 2008년 7만명이 희생된 원촨 대지진 역시 싼샤댐에 담긴 물의 무게를 지반이 이기지 못해 발생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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