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보리밭 기행>아스라한 기억 저편 신록의 春情 청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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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5-04-19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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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고창군 공음면 청보리밭


아주경제 최규온 기자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는 광활한 들녘이 한없이 늘어선 전북 김만평야 진봉반도 한 복판에 자리하고 있다, 내 집에서 학교까지는 2km 남짓하고, 등·하교 시엔 드넓은 벌판 한 가운데 일직선으로 뻗어 있는 신작로를 지나야 한다. 논과 논 사이에 맨 살처럼 쭉 뻗어 있는 신작로는 자로 잰 듯 한치도 구부러짐이 없었다.

지금은 서정이 물씬 묻어나는 아련한 추억으로 다가오지만, 겨울철 왼 벌판이 한얀 색으로 덧칠되고, 심포항 포구에서 매운 해풍(海風)이 밀려들기라도 하면 어린 마음에도 그 쓸쓸함과 황량함을 주체하기 어려웠다. 바로 엊그제 같은 유년시절이었는 데 벌써 40여 년 넘는 세월이 덧없이 흐르고 말았다.

꼭 이맘때쯤이다. 바둑판 모양으로 바다처럼 넓고 아득한 벌판, 뙤약볕에 달아 아른거리는 논고랑 너머로 지평선이 끝없이 펼쳐진 벌판은 푸른 하늘을 이고 있는 짙푸른 땅으로 변한다.

어린 시절의 향수가 빼곡히 담겨 있는 청보리밭! 신작로 양 옆으로 출렁이는 연초록 청보리의 풋풋함과, 그에서 뿜어 나오는 비릿한 내음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소금기 담은 갯바람이 튼실한 이삭을 매달고 있는 보리밭을 쉬~이, 현기증 나게 휩쓸고 지날 때면 청보리는 파도가 밀려드는 물결처럼 춤을 춘다.
 

 

일교차가 심한 날이면 새벽안개가 앉았다 간 너른 논고랑 보리 알갱이마다 무지개 색깔의 보석 같은 이슬방울이 송글송글 맺혀 있다. 동녘 하늘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새벽이나 노을이 붉게 물든 저녁 무렵이면 보리밭은 수채 물감으로 그려 놓은 풍경처럼 아름답다.

나른한 봄날 무심하게 한 눈이라도 팔고 지나치다 보면 청보리는 어느 새 탐스런 알맹이를 달고 아이들 키만큼 훌쩍 자라 있다. 청보리가 익으면 봄도 그만큼 무르익는다.

◇춘궁기 배고픔과 고단함, 그리고 천형의 시인 한하운

청보리 밭은 어른들에게는 춘궁기의 배고픔과 고단함이 배어있지만 어린 것들에게는 멋들어진 놀이터가 되었다. 학교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올 때 아이들은 신작로를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다. 보리밭은 술래놀이의 훌륭한 무대가 된다.

아이들이 밟고 지나간 청보리밭은 양탄자를 깔아 놓은 듯 판판한 담요로 변해 있다. 아이들은 그곳에서 시시콜콜 잡담을 벌이거나 씨름도 하고, 과자나 빵 부스러기를 나눠 먹기도 한다. 때론 세상모르게 잠에 푹 빠지기도 한다. 그곳에는 모든 시간이 정지돼 있다.

어느 정도 자란 보릿대는 아이들에겐 맛깔스런 악기가 되기도 한다. 보릿대를 꺾어 만든 보리피리는 연주하는 법을 따로 배우지 않아도 된다. 그저 입술에 대고 불기만 하면 그만이다. 삐~비~비~, 보리피리 불며 어린 새싹들은 무료함을 달래고 동심을 살찌웠다.

청보리를 떠올리면 자연스레 소록도 천형(天刑)의 시인 한하운의 사무치는 고독과 애절한 설음이 교차한다.

보리피리 불며/봄 언 덕/고향 그리워/피-ㄹ 닐리리./보리피리 불며/인환의 거리/인간사(人間事) 그리워/피-ㄹ 닐리리/보리피리 불며/방랑의 기산하(幾山河)/눈물의 언덕을 지나/피-ㄹ 닐리리.(보리피리 전문)
 

▲청보리를 떠올리면 소록도 천형(天刑)의 시인 한하운의 사무치는 고독과 애절한 설음이 교차한다 


나병으로부터 오는 절망과 세상 사람들로부터 유리된 채 유랑생활을 해야 하는 고독 속에서 고향과 어린 시절, 그리고 세상사가 그리워 보리피리를 부는 시인.

“청운의 뜻이 허허, 천형의 문둥이가 되고 보니 지금 내가 바라보는 세계란 오히려 아름답고 한이 많다. 아랑곳없이 다 잊은 듯 산천초목과 인간의 애환이 다시금 아름다워 스스로 나의 통곡이 흐느껴진다. 나를 사로잡는 것, 그것은 울음 속에서 터지는 모든 운율이 나의 노래가 되고 피리가 되어 조국 땅 흙 속에 가라앉는 것이다.” 라는 그의 말을 되새기면 이 시가 한층 처절하게 와 닿는다.

구성진 보리피리는 그저 아이들이 무심코 꺾어 부는 그런 소리가 아니다. 절박하게 살고 싶은 한 인간이, 모든 인간조건을 박탈당한 한 인간이 오직 보리피리에 기대어 사는 집념과 위안인 것이다(권웅·한국의 명시 해설)

도시인들에게 청보리밭은 낯선 존재가 된지 오래다. 도시인들뿐만 아니다. 언제부터인가 보리밭은 우리들 기억 저편으로 멀찌감치 사라져 갔다.

세월이 한참 흐른 지금 누렇게 익어가는 보리밭은 쳐다보기만 해도 괜스레 허기가 진다.

◇광활한 들녘 봄 축제 한창

전북 고창 땅은 언제 찾아가도 정겹다. 천년 고찰 선운사와 도솔암의 그윽한 숲길이며 산비탈을 한 구비 돌면 넉넉하게 펼쳐진 구시포 앞 바다, 비산비야(非山非野)의 고만고만한 황토 빛 구릉, 고창읍성(모양산성) 등에 이르기까지 눈 둘 곳이 널려있다.

봄의 신록과 여름의 바다, 가을 단풍, 겨울 설경까지 사계절 모두 제 맛을 간직하고 있는 땅이 고창이다. 여기에 또 하나 명물이 등장했다. 청보리 밭이다.
 

4월이면 공음면 선동리 ‘학원관광농원’ 황토벌은 푸른 파도가 넘실대는 청보리 밭으로 둔갑한다. 남도(南道)의 산과 들이 한바탕 봄꽃 잔치로 벅적댈 무렵 고창의 한 들녘에서는 신록의 청보리가 소리없이 춘정(春情)을 실어 나른다. 요즘 같은 시대에 이 너른 황토벌판에 웬 청보리인가.

학원관광농원은 진의종 전 국무총리의 장남 진영호(67)씨 부부가 터전을 일구고 있는 땅이다. 진씨는 대학(서울 농대)을 졸업한 뒤 대기업에서 이사까지 지냈으나 23년 전 직장에 사표를 내고 40대 늦깎이 농사꾼으로 고향에 내려왔다. 어릴 때부터 꿈 꿔온 농장에 대한 미련을 접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학원농장은 진씨 어머니인 이학 여사가 처음 개간했다고 한다. 잡목이 무성했던 야산으로 마을 사람들이 땔감이나 얻었던 불모지를 사서 일구기 시작했다. 진씨는 이곳에서 처음에는 꽃을 재배했고, 보리농사는 20여년 전부터 시작했다.

단순히 품이 덜 들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시작했던 보리농사가 지금에 와서 도시인들의 관광 명소로 탈바꿈 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이곳에서 펼쳐지는 청보리 축제는 고창군의, 아니 전국의 대표적인 명품 축제로 자리잡았다.

올해도 18일부터 다음 달 10일까지 23일 동안 청보리밭 축제가 열린다. 봄이면 초록 물결이 넘실대는 이곳은 가을이면 또 순백의 메밀·유채꽃, 자운영 꽃길이 지천으로 열린다.
 

▲진의종 전 국무총리를 기리는 ‘백민 기념관’ 내부 


관광농원 한 쪽에는 진의종 전 국무총리를 기리는 ‘백민 기념관’이 있어 들러 볼만하다. 역대 유명인사들과 함께 한 사진들과 함께 오랜 세월이 묻어 있는 고가구 등이 마치 박물관을 연상케 한다. 기념관 앞 공터는 농장이 만들어지기 전부터 마을사람들이나 지인들이 나들이 겸 자주 찾았던 곳으로 석탑과 소나무 숲이 운치를 더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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