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사의 치욕' 인혁당 사건 고 도예종씨 외 8명 "50년 만에 누명 벗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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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5-05-31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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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경제 최수연 기자 = 지난 1964년 박정희 정권이 북한의 지령을 받고 반정부 조직을 만들었다며 혁신계 인사 수십명을 잡아들인 '1차 인민혁명당(인혁당) 재건위원회 사건'의 고 도예종씨 등 9명이 마침내 누명을 벗었다.

1일 법조계에 따르면 피해자들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이 일부 남아 있지만 유무죄를 가리는 형사 재판은 사실상 끝났다. 중앙정보부의 수사 발표 51년 만이고, 대법원 첫 판결 후 50년만이다.

1964년 8월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북한 노동당의 지령을 받고 국가 변란을 기획한 인민혁명당 사건을 적발해 일당 57명 중 41명을 구속하고 16명을 수배중이다'라는 발표문을 낭독했다. 박정희 정권의 대표적 공안조작 사건인 1차 인민혁명당 사건의 시작이었다.

사건은 서울지검 공안부로 송치됐다. 검사들은 전력을 다해 수사했지만 증거 불충분으로 도저히 기소할 수 없다고 맞섰다. 검찰 상부에서 구속 만기가 되는 날 당직 검사 명의로 중앙정보부의 사건 송치의견서를 그대로 베껴 도예종씨 등 26명을 기소해버리자 담당 검사들은 일제히 사표를 던졌다.

기소 이후에도 인혁당 사건을 둘러싼 잡음은 끊이지 않았다. 26명이 중앙정보부에서 나체로 물고문, 전기고문을 당했다는 사실과 사건 조작설이 퍼지자 검찰은 재조사에 나섰다. 14명은 공소취소로 석방됐다. 도씨 등 12명과 이후 추가로 구속된 1명 등 13명이 반공법 위반 등으로 재판에 넘겨졌다.

이후 도씨 등 7명은 실형을 선고받았고 나머지 6명에 대해서는 집행유예가 선고됐다. 1심은 2명에 대해서만 유죄로 판단했다. 그러나 항소심 재판부는 전원에게 징역 1∼3년에 일부 집행유예 판결을 내렸고 이듬해 형이 확정됐다.

이후 중앙정보부는 1974년 유신반대 투쟁을 벌인 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민청학련)을 수사하면서 인혁당 재건위를 배후로 지목, 1차 인혁당 사건 연루자들을 다시 잡아들였다.

도씨 등 8명에게는 사형이 선고됐고 17명은 징역 15년∼무기징역형이 선고됐다. 도씨를 포함, 사형선고를 받은 피고인들은 판결 18시간 만에 형이 집행됐다. 훗날 2차 인혁당 사건은 최악의 사법살인이라는 오명이 따라붙었다.

2차 인혁당 사건의 유족들은 의문사위원회 진상조사 결과 등을 근거로 2002년 법원에 재심 신청을 냈고 2007∼2008년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1차 인혁당 사건의 피해자들도 2011년 재심을 청구했고, 대법원에서 유죄를 선고받은 지 50년 만인 이달 29일 대법원에서 무죄확정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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