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스페셜]친청감옥, 중국역사 관통하는 중국제일감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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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5-08-24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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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친청감옥 입구 모습.[사진=바이두]


아주경제 베이징특파원 조용성 기자 = 서슬퍼런 문화대혁명 10년 광풍을 주도했던 장칭(江青). 마오쩌둥(毛澤東)의 네번째 부인인 그는 마오의 사망과 함께 1976년 체포돼 친청(秦城)감옥으로 이송됐다. 이 때 장칭을 체포했던 인물은 지난 21일 100세를 일기로 사망한 왕둥싱(汪東興) 전 중난하이(中南海) 경호국장이었다. 사형을 선고받은 장칭은 20㎡의 좁은 감방에서 복역초기 "이것은 마오쩌둥의 혁명노선이 아니다"라고 소리치곤 했지만 이내 체념하게 됐고, 친청감옥에서 15년을 복역한후 1991년 자살했다.

장칭이 자살하기 2년전인 1989년 공산당 총서기에 오른 장쩌민(江澤民) 전 국가주석은 권부 요직을 상하이(上海)시 출신으로 하나둘 채워나갔다. 상하이시 서기 출신인 장쩌민은 유능하고 믿을 수 있는 상하이 인사들을 중용했으며, 이들은 상하이방이라는 거대세력을 이뤘다. 베이징의 기존세력들 귀에는 상하이 방언이 맘에 들지 않았다. 베이징세력들과 상하이세력들간에 한바탕 정치투쟁이 벌어졌고, 베이징시 현직 서기였던 천시퉁(陳希同)이 비리혐의로 낙마했다. 1995년 천시퉁은 중앙기율위원회의 조사를 거쳐 친청감옥으로 이송됐다. 16년형을 언도받은 그는 2006년까지 이곳에서 복역한 후 가석방된 후 투병생활 끝에 2013년 사망했다.

◆장칭, 천시퉁, 천량위. 굵직한 정치범들

2002년 공산당 총서기에 오른 후진타오(胡錦濤) 전 주석은 집권후 상하이방이 독식하다시피 한 중국 권부와 마주쳤다. 10여년전과 마찬가지로 후 주석이 주도하는 공청단파와 상하이방의 정치투쟁이 벌어졌고 후진타오 집권 4년째인 2006년 9월 천량위(陳良宇) 상하이시 서기가 비리혐의로 체포됐다. 천량위는 친청감옥으로 이송됐으며 18년형을 선고받고 현재 친청감옥에서 복역중이다.

후진타오 집권 마지막해였던 2012년 1월 발생한 왕리쥔(王立軍) 충칭(重慶)시 공안국장의 망명시도에 이어, 그해 9월 체포된 보시라이(薄熙來) 전 충칭시 서기 역시 친청감옥으로 이송됐다. 보시라이는 그해 11월 공산당 전국대표대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 진입이 유력했지만, 체포와 함께 꿈이 좌절됐다. 보시라이 아들인 보왕즈(薄望知)는 지난해 11월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아버지는 여전히 친청감옥에서 수감돼 있다"고 말한바 있다.

고급정치범을 전문적으로 수감하는 곳인 베이징(北京)의 친청감옥은 2012년 11월 시진핑(習近平)이 중국공산당 총서기에 등극하면서 더욱 바빠졌다. 시진핑 지도부 출범과 동시에 반부패바람이 중국 정계를 거세게 강타했으며, 고위관료들이 속속 체포돼 친청감옥으로 이송됐다. 친청감옥은 중국의 역사를 관통하고 있다.
 

왼쪽부터 장칭, 천시퉁, 천량위.[사진=바이두]


◆초기에는 국민당 장군들 수감

친청감옥은 베이징시 창핑(昌平)구 샤오탕산(小湯山) 근처에 위치해 있다. 창핑구 싱서우(興壽)진(鎮) 친청촌(村)에 있다고 해서 명칭이 친청감옥이다. 중국의 감옥은 모두 사법부가 관할하지만, 이 곳만큼은 유일하게 사법부가 아닌 공안부의 통제를 받지 않는다. 고위급 부패사범들이 주로 투옥되는 만큼 친청감옥은 ‘중국제일감옥(中国第一監獄)’이라는 명칭으로 불린다.

친청감옥은 1958년에 건설됐다. 1950년대 소련은 중국에 공장, 건물 등 157개의 원조프로젝트를 진행시켰다. 이 중 한 프로젝트가 친청감옥 건설사업이었다. 친청감옥건설은 비밀리에 진행됐기에, 당시 공개된 원조프로젝트는 156개였다.

친청감옥이 완공된 1958년 중국 공안부는 국공내전기간 체포됐었던 국민당 전쟁범을 수감시켰다. 수감대상은 소장이상의 국민당군 장성들이었다. 중국은 전쟁범을 농장건설, 작물생산, 감옥시설건설 등의 노역을 시켰다. 이 곳의 존재는 당시만 해도 철저히 비밀에 붙여졌으며, 인근 주민들 역시 이 곳을 소련이 건설해준 체육시설로 알고 있었다고 한다.

◆문혁과 함께 6개동 신축해

초기의 친청감옥은 3층짜리 건물 4동으로 구성됐다. 각각 갑동, 을동, 병동, 정동 등으로 이름붙여졌다. 1인1실이며 각 방마다 단독화장실이 배치돼 있었다. 침대가 구비돼 있으며, 책상은 요청시에만 제공됐다. 사람 키보다 높은 곳에 창문이 있어서 수감자들은 창을 통해 하늘과 바깥의 산을 볼 수 있을 뿐이었다.

1967년 문화대혁명이 발발하자 이곳의 수감자수가 급증했다. 중국은 소련 건축가가 작성한 설계디자인에 따라 6개동을 신축했다. 각각 무, 기, 경, 신, 임, 계의 이름이 붙여졌으며, 이로써 친청감옥은 10개동 건물의 면모를 갖추게 됐다.

문화대혁명과 함께 무수한 고위관료들이 이곳에 수감됐다가 1976년 문혁 종료와 함께 대부분 석방됐다. 장칭을 비롯해 왕훙원(王洪文), 장춘차오(張春橋), 야오원위안(姚文元) 등 문혁4인방은 문혁종료와 함께 이곳에 수감됐다.
 

재판을 받고 있는 보시라이의 모습.[사진=시나웨이보]



◆베이징호텔 요리사가 만든 식사

1989년 톈안먼(天安門)사태가 발발하자 시위주동자들이 대거 친청감옥으로 이송돼 왔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중국의 대표적인 반체제인사인 류샤오보(劉曉波) 역시 친청감옥에 수감됐었다. 이 중 일부는 반혁명분자의 꼬리표를 달고 아직도 친청감옥에 남아있다고 한다.

1990년대 이후 친청감옥 수감대상은 주로 장차관급 이상 부패관료였다. 친청감옥에서 근무했던 허뎬쿠이(何殿奎)는 과거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고위급 수감자들에게는 장관급 식사가 제공됐다"고 소개하기도 했다. 그는 매끼 밥, 2가지 반찬, 국으로 이뤄진 4단 도시락을 수감자들에게 분배해줬다고 한다. 음식은 베이징호텔의 요리사가 만들며, 가끔씩 샥스핀이나 해삼 등 고급요리가 제공됐다고 회고했다.

이들의 감방에는 책상, 화장실, 세탁기가 구비돼 있다. 책과 신문을 읽을 수 있으며 매일 저녁 7시~9시에는 TV시청도 가능하다. 가족이 가져온 옷과 일용품을 사용할 수 있으며, 죄수복을 입지 않아도 된다.
 

재판을 받고 있는 저우융캉의 모습.[사진=CCTV 캡쳐]



◆저우융캉, 궈보슝도 친청감옥에

시진핑 지도부가 들어선 이후 100여명의 고위관료들이 비리혐의로 체포됐지만, 친청감옥에 수감중인 것으로 확인된 고위관료로는 류톄난(劉鐵男) 전 중국 국가에너지국장 겸 국가발전개혁위원회 부주임, 지젠예(季建業) 전 장쑤(江蘇)성 난징(南京)시장 등에 불과하다. 고위관료가 어디에 수감되어있는지 공개되는 일은 극히 드물다.

비리혐의로 체포된 저우융캉(周永康) 전 상무위원과 궈보슝(郭伯雄) 전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링지화(令計畫) 전 통일전선부장 역시 친청감옥에 수감돼 있을 것이라는 예상은 많지만 공식적으로 확인된바는 없다. 저우융캉의 경우 그가 네이멍구(內蒙古)자치구 바오터우(包頭)시 한 군사감옥, 톈진(天津)시 특별감옥, 산둥(山東)성 양구(陽谷)현 특별감옥에 있다는 등 소문이 무성했다. 하지만 친청감옥에 수감돼 있을 것이라는 게 중국 내부관계자들의 관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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