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93년 취임하면서부터 한국 경제의 개혁·개방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이는 1986년부터 시작한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이 1993년 12월 타결된 것이 원인이 됐기 때문이다. 당시 한국은 상품, 금융, 건설, 유통, 서비스 등 모든 분야에서 외국에 문호를 개방했다.
이어 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94년 한국 경제가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 정부·기업 등 모든 주체가 선진국 수준으로 변해야 한다는 내용의 ‘세계화’ 구상을 발표했다.
재계도 김영삼 전 대통령의 세계화에 힘을 보탰다. 특히 대우그룹이 모토로 내세운 세계경영이 주목받았다.
정(政)과 경(經)이라는 다른 자리에서 대권, 세계, 월드컵 등 같은 꿈을 꿨다. 두 사람이 품은 꿈은 매우 닮아있었지만 종착지가 달랐던 탓에 때로는 악연(惡緣)으로, 때로는 선연(善緣)으로 다가왔다.
두 사람은 비슷한 시기에 각각 '세계화'와 '세계경영'을 부르짖었고, 이를 통해 새로운 변화와 개혁을 시도한다.
김 전 회장의 대우그룹은 1993년 당시 내수에만 치중했던 다른 기업과 달리 ‘세계경영, 대우가 있습니다’는 내용의 TV 광고를 통해 세계경영의 시작을 알렸다.
대우그룹은 세계경영을 앞세워 모든 역량을 해외 시장으로 집중했다. 그 결과 1998년 말 대우그룹은 396곳의 해외 현지법인, 21만9000명의 해외임직원, 41개의 국내계열사, 10만5000명의 국내임직원을 갖춘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한다.
대우그룹의 세계경영 전략은 김 전 대통령의 세계화 구상에 힘을 실어준 것으로, 대우기업의 해외진출 행보를 좇아 국내 여러 기업이 세계 각국에 공장과 법인을 세웠다. 이는 기업의 해외시장 진출을 활성화시키고 한국을 세계로 알리는 기점을 마련하게 된다.
SK(당시 선경)의 경우 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이 재임하던 문민정부 시기, 우여곡절 끝에 정보통신사업에 진출해 에너지‧화학과 함께 양날개를 구축했다.
선경은 1992년 8월 제2 이동전화 사업자로 선정됐다. 그러나 당시 유력 대권 후보였던 김영삼 민자당 대표가 노태우 전 대통령의 사돈 기업인 선경의 특혜라고 반대해 일주일만에 사업권을 반납하고, 새 정권 아래에서 재추진하기로 했다.
고(故) 최종현 선경 회장은 당시 전경련 회장으로, 전경련이 사업자로 선경을 선정하면 재계와 반목할 수 있어 난국에 빠졌다. 결국 최 회장은 제2 이동전화 사업권 경쟁을 포기하고, 민영화를 추진하던 한국이동통신(현 SK텔레콤)을 인수해 이동통신사업에 진출했다.
삼성도 이 시기 이건희 회장의 꿈이었던 승용차사업에 뛰어들었다. 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과 이건희 삼성 회장(현 삼성전자 회장)은 1993년 취임 초만해도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김 전 대통령은 이 해 8월 이 회장을 독대했는데, 이는 재계 인사 중 최초였다. 이어 김 전 대통령은 이 회장을 IOC(국제올림픽위원회)위원으로도 추천했다. 이 회장은 곧바로 김 전 대통령으로부터 승용차사업 진출 승인을 받아 밀월관계를 맺었다는 소문까지 났다.
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은 재임시절 ‘2002년 한·일 월드컵’ 유치에도 성공했다. 이 때 유치위원장을 맡은 이가 LG그룹 창업주의 동생 고(故) 구평회 E1 명예회장이다.
두 사람은 서울대 문리대 동기동창이었다. 이 같은 인연으로 구 명예회장은 김 전 대통령이 재임시절 무역협회장과 월드컵유치위원장 등의 역할을 맡았다.
지난 2012년 구 명예회장이 세상을 떠나자 김 전 대통령은 그의 빈소에 직접 방문에 오랜 인연의 마지막 가는 길을 함께 했다.
문민정부 시절 LG그룹은 36년간 사용하던 럭키금성의 이름표를 떼고, 1995년 1월부터 현재의 LG란 명칭을 전 계열사에서 사용하기 시작한다. 또 그 해 2월 구본무 회장이 회장으로 취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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