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당 이활의 생애-31]운영진 채용···실력파 인재들로 구성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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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6-07-08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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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주경제신문-한국무역협회 공동기획 (31)

  • 제2장 재계활동 - (26) 안식 높았던 상산(常山)

목당 이활 한국무역협회 명예회장[일러스트=김효곤 기자 hyogoncap@]


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한국무역협회는 그간 강성태(姜聲邰, 1906~1976년)가 총무부장으로 들어오게 되면서 제법 사무실 규모도 갖추어 갔다. 강성태는 서울 출신으로 경성제국대학(현 서울대학교) 법문학과를 나와 만주척식(滿洲拓植)(주)에 있다가 해방과 함께 귀국한 사람으로 그를 기용한 사람은 상산(常山) 김도연(金度演)이었다.

그는 1924년 예과 1회로 입학한 사람으로, 현민(玄民) 유진오(兪鎭午)와 동창이었고 당시 문과에는 이재학(李在鶴)이 있었다. 그는 또 학생 때 테니스 선수로 인기를 끌었던 스포츠맨이기도 하며 듬직한데다가 사교적인 인물이었다.

목당(牧堂) 이활(李活)은 대범하고 상산은 협회 운영의 세세한 일까지 직접 지시를 하는 성품이어서 목당으로서는 어딘가 상산에게 미안한 감을 금치 못해온 터에 강 부장이 들어옴으로써 목당은 홀가분해졌다. 가장 중요한 회원과의 접촉을 강 부장은 잘 해내었다.

총무부장 강성태(姜聲邰)
조사부장 나익진(羅翼鎭)
서무과장 오흥근(吳興根)
조사과장 이재항(李載沆)
기획과장 최재선(崔在善)

부서는 이렇지만 강성태는 총무부장 겸 사업부장으로 사무국을 총괄하는 위치에 있었는데, 강 부장에 대한 인사를 듣고 상산은 목당에게 이렇게 말했다.

“대한상사(大韓商事)의 김인형(金仁炯) 사장과는 좀 난처한 점이 없진 않아요. 김인형 사장과는 경성 제일보고(현 경기고등학교) 동창일 겁니다. 경성제대에선 현민과 동창이구요. 꼭 맞이하려면 중역 자리를 만들어 주어야 하겠는데 정관에 상무는 1명을 못박아 놓았단 말씀이야.”

사람은 탐이 나는데 대우가 걱정이라는 뜻이 아닌가.

“그렇다면 상대방의 의중을 떠보셨습니까?”

“자리는 관계치 않겠다는 겁니다.”

목당은 스스로가 협회의 실무를 맡아 운영하는 실무자로선 적임자가 아니라는 것을 그간 한 달 남짓의 경험으로 절실히 느끼고 있던 차였으므로 가능하면 이런 기회에 벗어나고 싶었다.

“본인이 관계치 않는다면 우선 총무부장으로 앉혔다가 기회를 보아 중역 자리를 만들어 주도록 조처하시지 그래요.”

이렇게 하여 강성태의 총무부장 취임은 실현 되었다.

과연 강성태는 상산의 눈에 들 만한 인물로서, 협회의 실무를 맡아 거침없이 처리하는 수완을 보였다. 협회 운영비가 다급하면 회원들로부터 특별찬조금을 걷어 조달하고 업자들의 개별적인 상담에도 일일이 응하여 의견이 있으면 받아들여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등, 초창기의 어려운 일을 신기할 정도로 유연하게 처리해 나갔다.

초창기 무역협회의 순조로운 발전을 뒷받침한 것은 이렇게 우수한 인재들의 능력과 수완에 힘입어서였다. 상산이 목당을 동반자로 하고 나익진을 조사부장, 강성태를 실무 책임자로 발탁하여 기반을 굳힌 것은 그의 사람을 보는 안목이 높았던 데 기인하였다 하겠다. 그리고 이런 흐름은 2대 회장으로 취임하는 목당으로 이어져 무역협회가 인재의 집단으로 전통을 잇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그간 조사과엔 조사과장 이재항, 직원 유형극(柳炯極)이 채용됨으로써 보완되었는데 이재항은 나 부장과 연대에서 우등을 다투던 동창 관계로, 나 부장의 천거에 의해서였다. 그러나 말쑥한 선비형의 인물은 그는 얼마 안있다가 재무관리처로 옮기는 바람에 후임으로 노철환(盧哲煥)이 들어왔다. 사업과장으로는 배경도(裵慶道)가 들어왔으나 그 또한 얼마 안 있다가 세무국으로 옮겨갔고, 교토제대(京都帝大) 출신으로 영어에 능통한 기획과장 최재선은 베테랑이었다. 영문 타자를 하는 사람이 드문 당시 사정에서 그는 늘 영문 타자기를 들고 다니는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그밖에 주극남(朱極南) 김경순(金庚順) 등이 있었는데, 특히 주극남은 자기 주관이 뚜렷한데다가 사리에 밝아 섭외 관계에 수완을 보임으로써 초창기의 협회 운영에 많은 기여를 한 공로자이다.

초창기 인물로서 가장 오래 협회에 몸을 담았던 사람은 조사부의 유형극이다. 그는 줄곧 조사부 일을 책임 져온 끝에 1963년에는 상무이사가 되어 1967년 10월 물러날 때까지 만 20년을 협회에 몸을 담아왔던 것이다. 아니 그보다 경리과 직원으로 들어온 김경순이 더 오래 남아 있었던 인물이다. 어쨌든 이런 인물들이 초창기의 면면들이며 모두 그 부분에서의 베테랑들이었다.

다시 얘기를 거슬러 올라가, 강성태가 총무부장으로 자리를 굳힐 무렵인 그해 12월 목당은 정부 입법의원으로 피선됨으로써 자연 협회를 비우는 시간이 많게 되었다. 그리고 이때쯤에는 회원들이나 직원들도 목당의 대범한 성품을 이해하게 되었고 상산과 목당 두 사람의 명예회장을 모시고 있거니 생각하게끔 분위기가 익어가고 있었다.

이리하여 1947년 4월의 제1회 정기총회에선 정관의 일보룰 고쳐 상무이사 1명을 약간 명으로 늘려 이활 상무이사 외에 강성태를 또 다른 1명의 상무이사로 추대하기에 이르렀고, 아무도 그것을 부자연스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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