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당 이활의 생애-59]무력 동원해 직선제 강행한 이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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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6-07-22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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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주경제신문-한국무역협회 공동기획 (59)

  • 제3장 재계활동 - (54) 인촌(仁村)의 불운

목당 이활 한국무역협회 명예회장[일러스트=김효곤 기자 hyogoncap@]


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민주국민당(民主國民黨)을 중심으로 하는 내각책임제 개헌 추진세력이 6월 국회에서 선출할 제2대 대통령의 후보를 미리 결정하기로 하였다는 정보를 입수한 정부는 1952년 5월 25일 ‘0’시를 기해서 경남과 전남북의 23개 시, 군에 공비가 출몰하는 위험이 있다는 구실로 계엄령을 선포하였고, 다음날인 5월 26일 오전 10시에는 헌병대를 풀어 등원하는 국회원들이 타고 가는 국회 버스를 중앙청(경남도청)까지 납치하게 하여 이 버스에 타고 있던 의원 가운데 개헌 추진과 인물 열 한 명의 의원을 구속하였다.

이렇게 비상계엄령 선포와 국회의원 납치 감금 사건 등 일련의 불법사태가 발생하자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는 5월 29일, 부통령직에 더 이상 머무를 수 없음을 밝히는 사퇴서를 국회에 제출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목당(牧堂) 이활(李活)은 무역협회 사무실에서 정담(政談)을 나누기를 기피했고, 그렇게 되니 이야기를 걸어오는 사람도 없었다. 다만 평소의 버릇대로 신문을 정독함으로써 목당은 사태의 진전을 자세히 파악하고는 있었다. 즉 인촌이 이승만(李承晩) 대통령(大統領)과 정면대결하기로 결단하였음을 그는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최후수단으로 계엄령을 선포하고 총칼로 대통령직 연임(連任)을 노리는 이승만에게 인촌이 하나의 항의의 표시로 부통령직을 내놓는다기보다 그의 행동은 정면대결의 선포로 보아야 했다.

사임서(辭任書)의 내용도 강한 것이었다. 계엄의 검열 때문에 국내 신문, 방송에는 보도되지 않았으나 목당은 뉴스위크 지(誌)를 통해 인촌이 제출한 사임이유서(辭任理由書)의 전문을 읽을 수 있었다.

인촌은 이유서에서 이승만의 독재를 낱낱이 지적하면서 과격한 표현마저도 서슴지 않고 있었다.

‘임시정부(臨時政府) 부산에 불법적인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소위 국제공산당(國際共産黨)과 관련이 있다는 허무맹랑한 누명을 날조하여 계엄하에서도 체포할 수 없는 50여 명의 국회의원을 체포 감금하는 폭거(暴擧)를 감행하였습니다. 이것은 곧 국헌(國憲)을 전복하고 주권을 찬탈하는 반란군 쿠제타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중병(重病)의 몸으로 이승만에게 도전장을 던져야만 했던 인촌이다. 정치에 나선 이상 대통령에의 뜻을 품는 것은 그도 가져 마땅한 꿈이었다. 그러나 그런 기회를 바로 눈앞에 두고 중병을 얻어 앓으면서 결투장에 나서려는 것이다.

탁월한 정치이론가로서, 투사이며 실무가(實務家)였던 설산(雪山) 장덕수(張德秀)는 그렇게도 바라던 나라의 독립을 눈앞에 두고 비명에 가야했던 마당에 이제 인촌은 회천웅도(恢天雄圖, 커다란 정치적 야망)의 기회를 눈앞에 두고 중병의 몸이면서 결전장(決戰場)을 택하고 있는 것이었다. 목당은 인촌의 부통령 사임이유서에서 그의 그런 처절한 심경을 읽을 수 있었다.

이 무렵 무역업계(貿易業界) 일부에도 심상찮은 바람이 일고 있었다. 원외자유당(院外自由黨)을 지원했던 굴지의 무역상사가 문을 닫고 잠적하는 사태가 그것이었다. 정계 바람에서 재계가 무풍지대로 남아 있을 수 없는 게 자본주의 사회의 생라기 아니랴.

그러나 업계 전체가 정계의 어수선함에 눈을 돌릴 겨를을 가지지 못할 실정이었다. 정부불불하(政府弗拂下)와 그에 따른 수입 경기로 들떠 있는 업계는 정계의 소용돌이가 다만 강 건너 불구경 이상은 아니었다.

발췌개헌안(拔萃改憲案, 임시 수도 부산의 제2대 국회에 제안되어 공포된 첫 개정 헌법안. 이승만 대통령이 희망한 대통령 직선제를 담고 있음)은 헌병과 경찰의 포위망 속에서 표결에 붙여져 기립표결(起立表決)이라는 형식을 거쳐 찬성 163, 반대 0, 기권 3표로 통과시킴으로써 결국 이승만의 승리로 돌아갔다. 자유당 천하가 약속된 것이다.

8월 19일에 실시된 정·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이 523만표로 대통령에, 함태영(咸台永)이 294만표로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태풍(颱風) 1주 후 목당은 동대신동에 이웃하고 있는 인촌을 찾아 문병했다.

인촌도 무척 수척해 있었다.

“너무 격조해서 미안합니다. 그래 몸은 좀 어떻습니까?”

목당은 진심으로 인촌에 대해 안쓰러운 마음이었다. 아무리 걷는 길이 다르기로 지난날 뜻을 같이 했던 동지요 친구인 그에게 너무 소홀하지는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 힘이 되어 주지 못한 것은 고사하고 안전지대에 몸을 숨기고 지내 온 듯한 스스로를 나무라는 심정이었다.

그러나 인촌은 목당을 대하자 매우 반갑다는 표정이었다. 인촌은 조용한 가운데 차도가 없는 치료로 하루하루를 보내는 터로, 목당은 이날 인촌이 권유하는 대로 오랜 시간을 머물며 그와 담론을 나누었다. 그것만이 목당이 인촌에게 베풀 수 있는 전부였는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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