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1953년 7월의 휴전협정이 있은 후 약 10억 달러에 가까운 원조에 힘입어 재건에 박차가 가해지면서 국민들도 활기를 되찾게 되자, 고려대학교(高麗大學校)도 학생 수입금만으로도 상당한 규모의 건설을 추진할 수 있게 된 것은 다행이었다.
1955년 농대 본관 착공(1956년 완공)·서관 계단교실 및 이학부·실험실(현재는 철거)
1956년 대강당·대학식당
1957년 중앙도서관 서고 증축·의대(현 이공대) 착공(1964년 완공)·농대 실험실 착공(1958년 완공)
1958년 이학부(현 교양학부) 착공(1960년 완공)
1959년 서관 착공(1961년 완공)
(*주: 위 내용은 원본인 ‘목당 이활의 생애’가 집필되었던 1980년대 초반을 기준으로 작성된 것으로 이후의 고려대학교 역사와 차이가 있을 수 있음)
6·25 남침 이전까지 두 채밖에 없었던 건물은 해를 거듭하는 가운데 10여 채로 늘어났다.
50년 기념행사를 마친 후 재단에 재기된 문제는 의과대학(醫科大學)을 설치하는 문제였다. 연희대학(延禧大學)은 벌써 세브란스 의과대학과 합병하여 교명(校名)까지 연세대학교(延世大學校)로 고치고 종합대학교가 되었는데 고려대학교가 의과대학 없이 종합대학을 노래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서구에서는 중세이래 종합대학에 의과(醫科)는 필수적인 구성부분이 되어 내려왔다. 그러나 의과대학은 다른 학과에 비해 돈이 많이 드는 대학이다. 다른 자연과학계 대학은 우선 신설해 놓고 실험실습 시설은 점진적으로 보충해 나갈 수도 있는 것이지만 의과대학만은 그렇게 되지 않는다.
의과대학 신설에 대한 연구는 재단이사로 참여하고 있는 유진오(兪鎭午) 총장에 맡겨졌는데 유 총장의 의견은 우선 종합병원을 신설하여 그것을 키우고, 그런 다음에 병원 부속 모양으로 의과대학을 시작하여 그것을 키워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이었다. 이사회에서도 그것이 타당한 방법이라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그리하여 의과대학 신설 문제는 그러한 방향에서 종합병원의 신설을 구상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ㄷ 1956년 9월 초 뜻밖에 유 총장이 이사회에서 꿈도 꿀 수 없었던 기쁜 제안을 해왔다. 내용인즉 천주교의 노기남(盧基南) 대주교가 성신대학(聖神大學) 의학부(현 가톨릭 의과대학, 가톨릭대학 여의도 성모병원)를 고려대학 재단에서 인수해 달란다는 것이었다. 대학뿐 아니라 부속병원(성모병원(聖母病院))도 무조건 양도하겠고, 양도한 뒤에는 교인(敎人) 간호원(수녀(修女))들까지 계속 근무토록 하겠으며, 현재의 관계요원인 교수·의사와 직원을 그대로 인계해 달라는 것 말고는 부속안건(附屬案件)도 없다는 것이었다.
이사진(理事陣)은 환호성을 올렸다. 이렇게만 된다면 명실공히 고려대학교는 종합대학교의 꿈을 실현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재단에서는 이사회의 결정으로 부지(敷地) 선정에 들어가 애기능을 의대 부지로 정하고 의대 및 부속병원을 신축할 계획을 진행하는 한편 의대 신설의 책임자로 이대(梨大)의 이세규(李世珪) 박사를 초빙키로 했다. 새해 신학기(그때는 2월)에 의예과(醫豫科) 학생 모집을 단행하자는 것이었다.
12월 중순에는 성신대 의학부 관계자들의 명단까지 교부받아 24일(월요일)에는 양교(兩校) 재단 당사자들이 인계서류에 정식 조인한 후 성대한 기념파티를 가질 것까지 합의를 보았다.
그렇던 이 계획이 최종 순간에 가서 어이없이 깨어질 줄이야! 조인(調印) 예정 이틀 전인 22일 돌연 노기남 대주교로부터 대학을 인계하지 않기로 방침이 변경되었다는 일방적인 통고가 있은 것이다.
양도양수(讓渡讓受) 계약이 있었던 것도 아니며 계약금이 오고 간 것도 아니고 보면 내놓겠다는 측이 생각을 달리해 안 내놓겠다고 하면 그것으로 그만이지만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었다. 그쪽 의대 동창회가 들고 일어났다고도 하고 활동력이 강한 양(梁) 모 신부(神父)가 미국에서 돌아와서 반대하고 나섰기 때문이라고도 했지만 알 수가 없었지만 그것으로 4, 5개월을 허비하며 진행해 오던 사업은 중단되고 만 것이다. 다만 의대 신축계획은 이미 예산조치가 끝나 있었기 때문에 그대로 추진해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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