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박상훈 기자 =시국이 어수선하다. 특히 '국정농단의 본거지'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문화체육관광부를 중심으로 '최순실·차은택' 불똥은 그 산하기관과 관련 기업들에게까지 옮겨붙고 있다. 현 정부의 주요 국정기조 가운데 하나인 '문화융성'은 뿌리째 흔들리고 있고, '이 나라 높으신 분들에게 문화는 대체 무엇이냐'는 자조 섞인 목소리는 점점 커지고 있다.
그래서 더 궁금했다. '위에서 내리꽂는' 문화가 아닌 '아래로부터 스멀스멀 올라오는' 문화를 지향해 온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과 주성혜 원장(54)은 이 '문화 아수라장'을 어떻게 헤쳐가고 있는지. 또 이 기관이 비전으로 삼고 있는 '삶의 질 향상을 위한 문화예술교육 실현'이 이 땅에서 가능하긴 한 것인지.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학과 교수이기도 한 주 원장은 고저장단(高低長短)이 분명한 목소리로 인사말을 건넸다. "보통 '음악학'이라 하면 유명 작곡자들의 작품이나 그 주변 이야기를 많이 하게 마련이잖아요? 그렇지만 제 관심사는 작품보다는 사람들의 반응, 음악을 둘러싼 가치관 등이에요. 그러다 보니 진흥원에 와서도 계량적 수치보다는 문화를 수용하는 사람들에 관심을 두게 되더군요. 제가 쓴 책에 '사물보다는 태도에 집중하고 싶었다'라는 문장이 강조되는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진흥원은 지난 2005년 문화예술교육지원법을 근거로 설립된 문체부 산하의 공공기관이다. 주요사업은 학교·사회문화예술교육 지원, 문화예술교육 전문인력양성사업, 문화예술교육 학술 연구·조사, 문화예술교육 국제교류업무 등이다. 주 원장은 "예술은 예술인들을 위한 전문적이고 기술적인 영역이 아니라, 국민 누구나 이를 통해 행복하게 지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며 "진흥원은 전국민이 일상적 삶 속에서 문화예술교육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지원하는 곳"이라고 소개했다.
문화소외 지역에 있는 400명 이하 소규모 학교를 대상으로 전교생 모두가 문화예술교육에 참여할 수 있도록 최대 4년간 지원하는 '예술꽃 씨앗학교'는 진흥원의 대표적 사업 중 하나이다. 지난달 31일부터 사흘간 전북 무주에서 열린 '성과 공유회'에서는 전국 6개 학교 300여명의 초·중·고 학생들이 모여 창작 뮤지컬, 창작 음악극, 오케스트라, 합창 등 다양한 공연을 선보이기도 했다.
주 원장은 "진흥원에 오기 전에도 대학생들과 함께 예술꽃 씨앗학교를 자주 찾았다"며 "이 프로그램에 공감한 학부모들이 자신들의 자녀를 대도시의 학교에서 중소도시 학교로 전학을 시키는가 하면, 잦은 결석에 수업에 집중하지도 못했던 학생들이 이 과정을 통해 자신감이 높아지고 발랄해지는 등 지역사회를 변화시키는 힘을 직접 목격했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사람 사귀는 방법, 마음 나누는 방법을 배운 것 같아서 무척 뿌듯하다"고 말했다.
학교에 가지 않는 토요일 박물관, 미술관, 도서관 등 전국 곳곳의 문화예술 기관에서 펼쳐지는 '꿈다락 토요문화학교'도 연일 화제다. 이 프로그램은 특히 아이들과 부모들이 합창, 골목길 체험, 주말문화여행 등을 함께할 수 있어 높은 호응을 얻고 있다. 주 원장은 그 중 특히 음악에 대한 아이들의 선입견을 깨주는 '꼬마작곡가'라는 프로그램에 애착이 간단다. 뉴욕필하모니에서 도입했다는 꼬마작곡가는 13주 동안 악보를 가르치지 않는 대신, 도화지에 자유롭게 그림을 그리게 하고 나중에 이를 바탕으로 아이들이 원하는 음악을 연주해준다.
진흥원의 교육 대상은 비단 청소년, 가족만이 아니다. 섬마을, 해외 산골 오지 등에도 '문화예술의 씨앗'은 뿌려지고 있다. 주 원장은 작년에 받았다는 '특별한' 편지 한 통 이야기를 꺼냈다. "출소를 앞둔 한 재소자로부터 온 것이었어요. 감옥에서는 강사들의 프로필을 알려주지 않아서 진흥원에 대신 문의한 것이었는데, '밖에 나가면 우쿨렐레 연주를 하고 싶다. 참여할 수 있는 연주단이 있는지, 수강료는 얼마나 하는지 알려줄 수 있느냐'라는 내용이었어요. 여느 사람들에게는 소박한 소망일지 모르지만, 그에게는 우쿨렐레를 계기로 세상과 소통하는 희망을 갖는다는 의미였겠지요."
◆ "좋은 교육은 상대방의 생각과 반응을 자연스럽게 이끌어 내는 것"
'최순실 사태'는 문체부와 문체부 산하 주요 공공기관들의 전문성을 지적하는 목소리로도 표출되고 있다. 국회 교문위 소속의 한 의원은 이들을 '비전문가들이 전문가 행세를 하며 생색내기 좋은 곳'이라고 일컫기도 했다. 2005년 예산 88억원으로 시작한 진흥원은 올해 1300억을 집행할 정도로 10여년 새 규모도 커지고, 사업 분야도 넓어졌다. 주 원장은 "다른 부처 같은 경우는 예산 확보 경쟁이 치열한데, 우리 기관은 아쉬운 소리를 하기 전에 예산이 늘어나는 경우가 많았다. 그 만큼 각 지역에서 문화예술교육 수요가 늘었던 것"이라면서도 "초라한 수준의 경상운영비, 정규직 인원의 2배에 이르는 계약직 등의 문제를 개선할 필요가 있고, 지자체별 문화예술 프로그램과 우리의 그것은 과연 얼마나 다른 것인지에 대한 자문도 해봐야 한다"고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래서 주 원장은 앞으로 사업의 방향성과 질을 고민하기로 했다. 진흥원의 과거 10년이 사업 확산을 통해 교육의 가치를 계몽하는 기간이었다면, 향후 10년, 아니 20~30년은 교육·연구·인력계발에 신경 써야 한다는 것이다. 그 중 그가 주목하는 부분은 예술인들의 지역적 분포 차이 때문에 발생하는 교육적 편차, 과거의 기능적 교육을 답습하는 받은 일부 예술인들 그리고 적당히 말로 얼버무리는 '사이비' 문화예술교육 등이다. 그는 "이를 줄이기 위해서 좋은 교육법, 교육정보 등을 연구·공급하고, 콘텐츠를 끊임없이 개발해야 한다"며 의지를 다졌다.
주 원장은 특히 '창의적인 연수'를 강조했다. 무용 강사가 연극 시간에 들어가고, 연극 강사가 음악 시간에 들어가는 등 이른바 '탈영역'을 지향하는 교수법이다. 그는 "한 번은 자투리 사업비 2억원을 모아 연극강사를 대상으로 80시간 짜리 연수를 진행했는데, 과정을 수료하며 그들이 눈물을 쏟았다. 정교한 방법론에 목말랐었기 때문이다"라며 "짜임새가 있는 교육법은 아이들을 만났을 때 그들의 생각과 반응을 자연스럽게 이끌어 낼 수 있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 "문화에 대한 전략적·경제적 접근 경계해야"
일반 시민들 특히 기초생활보장수급자·차상위계층 등은 "문화와 예술이 어떻게 삶의 질을 높인다는 것이냐"고 고개를 내젓기도 한다. 소위 '문화가 밥 먹여주냐'는 얘기다. 이에 대해 주 원장은 "우리 사회가 그동안 개개인들에게 '경제 우선 논리'를 과도하게 주입해 온 것을 부정할 수 없지만, 그래도 행복은 경제적 잣대로 잴 수 없는 것"이라며 "사회의 여러 논의를 경제적인 것에서 다른 가치들을 발견하는 일로 옮겨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는 또 "문화예술은 베토벤과 피카소만 하는 게 아니다. 작품보다는 활동에 훨씬 더 많은 의미를 두어야 한다. 인간이 더불어 산다는 건, 그래서 의미가 있는 게 아니겠느냐"고 덧붙였다. '문화융성'의 동의어가 '문화산업' '문화 상품'이 돼버린 듯한 작금의 현실에 적잖은 울림을 주는 그의 혜안이다.
문화계 일각에서는 "우리나라 문화예술교육은 그 내용과 형식에 있어 천편일률적"이라는 지적의 목소리가 나온다. 시·구청, 도서관, 미술관 심지어 '문센'(문화센터)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들이 비슷비슷하기 때문이리라. 주 원장은 "그 문제는 늘 그래왔다. 아마도 문화예술을 '제작·공급'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말이 나오는 것 같다"며 "같은 교과서로 공부해도 선생님에 따라 수업의 흥미와 이해도가 달라지듯이, 교육은 절대 기획만으로 되지 않는다"고 단호히 말했다.
그는 '예술은 만국 공통어'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거장들도 알고 보면 각자 다른 사연과 환경에 놓여졌었고, 그 속에서 형성된 가치관으로 특유의 예술세계를 펼쳤기 때문이다. 60~70대 이상 어르신들이 갑자기 힙합을 접한다고 해서 그것을 쉽게 즐길 수 없는 이유와 마찬가지다. 다만 그는 "예술을 외국어 배우듯이 접근하면 친근해진다"며 "저마다의 문법과 어휘를 가진 예술과 친해지면 이를 이해할 수 있게 되고, 그러면 더 많은 관심이 생겨 영역이 확장된다"고 조언했다. 아이를 따라 랩 경연 프로그램 '쇼미더머니'를 봤다는 그는 "처음엔 어렵고 낯설었지만, 점점 빠져들었다"며 웃었다.
주 원장은 마지막으로 문화를 전략적·경제적으로 바라보는 세태를 꼬집었다. "'한류'도 제대로 성공하려면 잘 팔리는 상품에만 집중할 게 아니라, 상대방으로 하여금 두고두고 우리의 이야기를 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문화적 리더십은 물건을 사고파는 것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마음이 교류에서 나오는 법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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