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윤세미 기자 = 영국 총선 이후 기업들이 소프트 브렉시트 요구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총선에서 의석을 대폭 확대한 노동당 역시 소프트 브렉시트를 요구하는 데다 보수당 내에서도 테리사 메이 총리의 하드 브렉시트를 재고해야 한다는 지적이 일면서 메이 총리의 EU 탈퇴 전략이 수정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전망이 제기된다.
하드 브렉시트에 대한 여론의 심판이라는 평가를 받는 이번 총선에서 보수당을 이끈 메이 총리는 의회 과반석을 상실하면서 사실상 참패했다. 소프트 브렉시트를 원하던 영국 기업들은 이 틈을 타 EU 탈퇴 방향에 대한 논의를 재시작할 태세다. EU 탈퇴에 따른 경제적 타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유럽연합(EU) 단일시장과 관세동맹에 머무는 방안을 요구하려는 것이다.
영국의 의료용 로봇 기술 개발업체인 캠브리지 메디컬 로보틱스의 마틴 프로스트 CEO는 블룸버그에 “영국 국민들은 섣불리 조기총선을 소집한 메이 총리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면서 메이 총리에 불확실성을 키운 책임을 물었다. 이어 그는 “그나마 소프트 브렉시트로 돌아설 가능성이 있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라고 덧붙였다.
실제로 파이낸셜타임즈(FT)에 따르면 최근 하버드대학교 연구진이 영국 소기업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거의 모든 기업들이 EU와의 무역을 현재와 다름없이 계속 이어나갈 수 있길 바란다고 응답했다. EU는 영국 기업들의 최대 무역 파트너로 영국산 제품 및 서비스 수출의 61%가 EU를 향한다. 또한 기업들은 현재 EU의 무역 규정에 만족한다면서 영국이 EU를 탈퇴하면서 현행 규정을 유지해주길 기대한다고 답했다. 기업들은 영국이 EU 탈퇴 이후 규제 변화에 따른 추가 비용을 우려했다.
영국 기업인 협회인 관리자협회(Institute of Directors)가 총선 후 실시한 기업신뢰도 조사에서도 많은 이들이 총선으로 인한 정치적 불확실성에 따른 사업적·경제적 악영향을 우려했다. 브렉시트 협상과 관련한 질문에서는 86%가 EU와 무역 협정을 체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답했고, 72%는 정부가 EU와의 무역 협정을 최우선 순위로 두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 같은 의견은 당초 메이 총리가 고수하던 하드 브렉시트와는 크게 다른 것이다. 메이 총리는 EU 단일 시장 및 규제에서 독립하고 국경 통제권도 완전히 되찾는 방법을 고집했다. 그러나 총선에서 사실상 참패하면서 유럽연합(EU) 법규를 대체하는 ‘대폐지법안(Great Repeal Bill)‘이 의회의 지지를 얻기도 힘들어졌다.
조지 오스본 전 재무장관 역시 9일(현지시간) BBC와의 인터뷰에서 “보수당은 EU 탈퇴 계획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며 하드 브렉시트의 의회 통과 가능성을 낮게 평가했다.
게다가 브렉시트에 따른 파장을 최소화할 수 있는 각종 입법이 필수적이지만 보수당이 과반을 잃은 만큼 시간 내에 제도를 마련할 수 있을지도 불투명하다. 이 같은 까닭에 보수당 내에서도 노르웨이 방식으로 EU 단일시장에 잔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가운데 메이 총리는 11일 소폭 개각을 단행했다. 다만 개각에 담긴 총리의 의도를 두고 매체별로 해석이 엇갈렸다. 메이 총리는 마이클 고브 전 법무장관을 환경식품농무부 장관으로 지명했는데, 인디펜던트 등 일부 매체들은 메이 총리가 하드 브렉시트를 고집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으로 풀이했다. 캐머런 전 총리의 최측근이었던 고브 전 장관은 캐머런을 배신하고 보리스 존슨 장관을 도와 국민투표에서 브렉시트의 승리를 이끌었다.
반면 블룸버그 통신은 사안에 정통한 소식통을 인용해 소프트 브렉시트의 옹호자인 필립 해먼드 재무장관이 브렉시트 협상에서 보다 큰 권한을 부여받을 경우에만 내각에 남겠다고 선언했었다면서, 이번에 유임된 것을 볼 때 메이 총리의 하드 브렉시트 노선이 조정될 것을 신호한다고 전했다.
이 같은 불확실성에 브렉시트 협상의 신속한 타결은 기대하기 어렵게 됐다. 12일(현지시간) 실무자급 회의가 시작되지만 메이 총리의 정치력이 약화되고 총리 교체 가능성도 거론되는 만큼 EU 관리들 사이에서는 협상이 예정대로 진행되더라도 얼마나 의미 있는 논의가 이뤄질지 의구심이 제기된다고 WSJ는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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