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 정보는 가장 가치 있는 재화

[사진 = 유목민 정보교환]
▶ 정보를 소홀히 했을 때 재앙 감수
정보의 중요성은 과거에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유목민들에게 정보는 역시 최상의 재화였다. 그들은 정보의 중요성을 인식하거나 체계화시키지 못했을지 모르지만 항상 정보를 중요시하는 자세가 생활 속에 녹아 있었다. 한 곳에 터전을 잡고 사는 정주민들과 달리 항상 이동하며 살아가야 하는 유목민들에게 정보는 상대적으로 훨씬 더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어디에 가축들에게 좋은 풀이 있는지, 그 곳이 외부의 공격으로부터는 안전한지, 겨울은 어느 곳에서 나고 여름은 어느 곳에서 나는 것이 좋은지, 이 모든 것은 사전에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과정을 거쳐서 선택했다. 이러한 정보 수집과 관리를 소홀히 했을 때 그들은 여러 가지 재앙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사진 = 초원의 연쇄번개]
▶ 생활화된 주변 정보의 수집과 활용

[사진 = 초원의 들풀]
그 산이 그 산 같고, 그 초원이 그 초원 같은 곳을 지나면서 길을 잃게 되면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유목민을 찾아 길을 물어보는 것이 목적지를 가장 빨리 찾아낼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다.
도저히 구분이 가지 않는 초원과 구릉 그리고 산과 계곡에도 고유의 이름이 붙어 있는 것이 신기하기까지 하다. 이처럼 유목민들은 주변 모든 것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고 활용하는 것이 생활화돼 있다.
▶ 정보마인드 가진 칭기스칸

[사진 = 유목민 정보전달]
즉 유목민들의 몸에 배어있는 정보존중의 전통을 상황에 맞게 활용했다는 얘기다. 특히 전쟁을 수행하는 데 있어 필요한 첩보를 수집해 해석하고 평가함으로써 자신에게 유리한 정보로 만들어 내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그 정보를 바탕으로 전투를 유리하게 이끌거나 아예 전투를 하지 않고도 승리를 낚아채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칭기스칸은 심리전과 홍보전에도 대가였다. 심리전과 홍보전 역시 정확한 정보를 바탕으로 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칭기스칸이 확실한 정보 마인드가 없었다면 구사될 수 없었을 것이다.
▶ 정보전략가 칭기스칸
금나라와의 전쟁이나 호레즘과의 전쟁은 정보 전략가로서 칭기스칸의 면모가 유감없이 발휘된 전쟁이었다. 두 전쟁 모두 나라와 나라 사이를 오가는 대상(大商)들을 정보원으로 적극 활용했다. 금나라와의 전쟁 때는 이슬람 상인들을 이용해 효율적인 공격 루트를 알아내고 금나라의 움직임을 사전에 간파함으로써 일사불란하게 적을 공격할 수 있었다.

[사진 = 말달리는 소년들]
▶ 대상(大商)을 이용한 정보수집과 활용

[사진 = 실크로드 대상단]
또 풀어놓은 첩자들이 여러 가지 정보들을 쉴 새 없이 물어 날랐다. 그 지역의 지리적 특징과 군대의 배치, 적병의 숫자, 무기의 종류, 주민들의 분위기, 궁정내의 움직임 등이 치밀하게 조사돼 칭기스칸에게 전달했다.
▶ "나는 적을 알고 적은 나를 모른다."
오늘날에는 거의 모든 나라가 정보조직을 국가의 핵심기관으로 삼아 평시에도 첩보를 수집해 분석하고 활용하면서 국가의 안전을 확보해 나가고 있다.
당시에는 특별한 정보기관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칭기스칸은 주로 케식텐(친위대)의 구성원들을 활용해 그 역할을 담당케 했다.
이와는 달리 호레즘이나 금나라 같은 전쟁 상대국은 적에 대해 자세히 알아 보려하지 않고 대체로 무시하는 태도를 취했다. 나는 적을 알고 적은 나를 모르니 싸움에서 누가 승리할 것인지는 자명한 것이 아니었겠는가?
▶ 정확한 정보를 바탕으로 한 공포전술
그러나 싸워서 이기는 것 보다 싸우지 않고 적의 항복을 받아내는 것이 최선의 방법인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칭기스칸은 정확한 정보를 바탕으로 공포라는 최대의 무기로 활용함으로써 전투 없이 승리하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적이 겁을 집어먹고 스스로 무너지도록 만들거나 두 손을 들도록 만들기 위해 적에게 공포심을 심어주는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했다.

[사진 = 몽골군 횃불전술(영화 칭기스칸)]
"몽골군은 항복하는 적에게는 최대의 관용을 베풀지만 저항할 경우 씨도 남기지 않는 잔인한 군대다."

[사진 = 사키 피에르 평원(횃불전술 현장)]
▶ 푸른 군대 이미지로 굳어진 '공포'
그러나 이 전술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푸른 군대가 무섭고 잔인한 군대라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그 시범케이스에 걸려든 곳은 철저하게 유린될 수밖에 없었다. 어떤 경우에는 성안에 살아 있는 것은 사람은 물론 가축까지 모두 죽이고 그 지역이 폐허가 되도록 모든 것을 파괴했다.
그러한 사례는 소문을 타고 인근 지역에 알려졌고 그 것을 적에게 공포를 안겨다 주는 수단으로 삼아 인근 지역을 손쉽게 손에 넣을 수 있었다. 호레즘과 유럽에서의 정복 과정을 보면 파괴와 살육으로 이어지는 경우 보다 치열한 전투 없이 마무리된 경우가 더 많았다. 그런데도 몽골의 푸른 군대가 마치 파괴와 살육, 폭력과 야만의 대명사처럼 인식돼 온 것은 그들이 심어준 공포가 하나의 이미지로 굳어져 전해져 내려온 탓도 있을 것이다.
▶ "정보 전략은 기술이자 예술"
특히 전쟁과정에서 정보전과 심리전이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지만 칭기스칸은 평소에도 이를 자주 활용했다. 우선 칸의 자리에 오르는 과정에서 심리전을 최대한 활용했다. 사람의 마음을 잡는 것이 바로 세상을 얻는 것이라고 생각한 칭기스칸은 당시 절대적인 믿음의 존재인 샤먼들을 이용해 자신을 하늘이 선택한 사람임을 널리 알려서 자연스럽게 칸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사진 = 자모카, 끓는 솥에 포로처형]
▶ 마무리 짓는 칭기스칸의 얘기

[사진 = 석양의 칭기스칸 가묘]

[사진 = 목화밭의 우즈벡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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