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송년회 철이다. 예전에는 ‘다 잊고 한 잔 하자’는 망(忘)년회라 불렀는데 언제부터인가 ‘보낸다’는 뜻의 송(送)년회가 대세다.
1960~80년대 산업화 시대 베이비 부머 형님·누님들은 너나 없이 고향을 등져야 했다. 그들은 줄줄이 딸린 동생들의 학비, 고향 부모님의 논 한 마지기를 더 챙기면서 자신의 앞길도 치열하게 개척해야 했다. 그만큼 한 해가 가는 12월이면 ‘객지의 힘들고 서러웠던 일 다 잊고 다시 일년을 살아내 보자’는 각오를 다질 일이 많았을 것이다. 지난했던 시절 용케 버티며 자식들 남부럽잖게 가르쳐 살림 내보내고, 손자들 돌보며 지내는 그들 덕분에 선진국 문턱에 이른 지금이라면 ‘망할 망’이 함께 있는 '망년'보다는 잘 가라 웃으며 손 흔드는 '송년'이 어감으로도 더 고급스럽다.
11월 중순부터 연일 이어지는 송년회로 간이 곧 배 밖으로 튀어나올 지경이다. 가려고 맘만 먹으면 일주일 평균 7일이 송년회겠지만, 몸은 하나에 지출도 한정된 터라 어느 모임은 가고 어느 모임은 빠질지 결정하는 일도 쉽지 않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우선이라, 만나면 그저 좋은 친구들보다는 ‘비즈니스’가 있는 송년회가 먼저인 것은 인지상정. 고로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모였든지 부자나 힘센 자리에 있는 공무원은 ‘자리를 빛내주는 사람’으로 주목을 받는다. 그들에겐 반드시 마이크가 주어지고 덕담이나 건배사 요청도 빠지지 않는다. 적극적으로 자기 명함을 주는 사람과 소극적으로 남의 명함을 받는 사람으로 나뉘는 것인데, 후자가 모임의 주류다.
부자도, 힘센 사람도 아닌 나는 어느 ‘비즈니스’ 송년회를 가든 주류로 대접받는 경우가 거의 없다. 혹간 ‘요즘 뭐하냐’ 묻는 이가 있어 ‘(아주 유명한) 이런저런 글을 쓰고 있다’고 해봐야 ‘응, 그래?’ 하고 만다. 나의 글이 그의 밥과 전혀 무관하기에 당연한 일이다. “인터넷에서 내 이름 검색해봐. 얼마나 유명한데···" 속으로 그런 맘이 들면 오히려 구차해져 기분마저 씁쓸해진다. 사정이 이런데 어느 송년회를 갈지 선택의 고민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어차피 가면 나에게 좋을 송년회라면 회비는 없고 비즈니스는 있는 자리가 가장 우선이다. 지갑 열 부담 없이 먹고 마시면서 각계 인사와 사교도 트고, 잘하면 ‘상호 윈윈’하는 일거리까지 말을 섞을 수 있는 자리인데 마다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다만, 이런 자리는 행사 비용을 대는 ‘요인들’이 필히 있으므로 괜히 잘난 척 설쳤다가는 ‘저 친구 저거 뭐야? 누가 불렀어?’란 소리 듣기 십상이니 눈치껏 조용히 목표 달성이나 하면 된다. 이런 자리는 끝나고 나면 기념선물도 꼭 준다.
가장 고역인 송년회는 ‘눈도장’ 찍어야 하는 송년회다. 그나마 회비라도 없으면 다행인데 회비까지 받으면 더하다. 이젠 체면도 좀 차려야 할 나이와 입장인데도 ‘저도 왔어요. 정말 존경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열심히 뛰겠습니다’ 하면서 쭈뼛쭈뼛 주인공 주변을 맴도는 일이란 정말이지 ‘쪽팔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어찌하랴. 먹고살고, 올라가고, 성공해야 하는데. 그나마 할 수 있으면 그래도 실세다. 그럴 입장도 못돼 방명록에 이름 석 자 꼬박 챙겨 쓴 후 가장자리에 앉아 머릿수나 채워주는 입장이었다 돌아오는 밤길은 처연하기 그지없다. 대저 이런 자리는 선물도 잘 안 준다. 사정이 이러하니 서로의 처지와 입장 불문하고 수평적 술상에서 흉금을 터놓는 ‘친구야, 어서 와~’ 동기동창회가 그저 반가울 뿐인 것이다.
기왕에 가는 송년회, 건배사를 신경 쓰기 바란다. 격조 있는 건배사로 그 자리의 의미를 고양시키는 것이 문화가 된 지 오래다. 혹시라도 건배사 주문이 들어오면 멋지게 해내야지 우물쭈물했다간 ‘에이, 저 사람 뭐야’란 저평가를 사서 받게 된다. 고로 멋진 건배사 한두 개를 미리 챙길 것을 권한다. 내가 지금까지 겪은 건배사 중 가장 인상 깊은 것은 ‘개나발!’이다. ‘개인과 나라의 발전을 위하여, 개나발!’ 문재인 대통령이 중국을 ‘성공적으로’ 막 다녀온 지금이 정말 그래야 할 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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