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만 동성애 활동의 상징인 치자웨이. 제공=양첸하오]
올해 5월 대만은 아시아 최초로 동성혼이 가능한 국가가 됐다. 대만의 다양성과 개방성은 거저 얻어진 게 아니다. 많은 인권운동가가 지난 수십 년간 동성애 혐오에 맞서며 인식을 바꿔놓은 결과다. 그중에서도 치자웨이(59)는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1986년 타이베이 한 맥도널드 매장에서 국제 기자회견을 열고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고백하고 성 소수자의 권리를 주장했다. 대만 역사상 첫 사례였다. 국민당 일당 독재체제였던 당시의 대만에서 이런 움직임이 용인될 리 없었다.
그렇게 별다른 명분 없이 그는 감옥에 갔다. 국제사회에서 인권 탄압국이란 비판이 쏟아지자 대만 정부는 5개월 뒤 그를 석방한다. 옥고를 치른 치자웨이는 본격적으로 동성애 권익 추진 운동에 나섰다.
‘동성애=에이즈’라는 낙인을 지우기 위해 노력했고 대중에게 동성애자와 친구가 되기를 권했다. 사람들은 자신과 다른 존재 두려워한다. 두려움은 혐오로 쉽게 변질된다. 이런 이유로 동성애자도 대중과 다르지 않음을 끊임없이 주장했다.
동시에 동성 결혼 합법화를 위한 법적인 싸움도 이어갔다. 1986년 타이베이 지방법원에 동성 결혼 신청했다가 거절당했다. 1998년 타이베이 지방법원에 “남자친구와의 혼인 관계를 인정하라”며 행정소송을 냈다. 결과는 패소였다.
2000년 동성결혼 관련 첫 번째 헌법해석을 신청했다. 대법원은 심리조차 하지 않고 기각했다. 동성 결혼에 대한 호소는 멈추지 않았다. 그사이 대만은 조금씩 달라졌다. 2004년 성 평등 교육법을 제정, 성 평등과 성 소수자 인권교육이 시행됐다.
동성애에 대한 호의적인 인식이 젊은 층을 중심으로 빠르게 퍼졌다. 2013년 치자웨이가 동성결혼을 신청하면서 법제화에 대해 기대감을 높였지만 시기상조였다. 행정소송에서도 패소했다. 두 번째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헌법재판소 심리가 올해 3월 시작되는 데 5년이 걸렸다. 이마저도 동성결혼을 지지하는 차이잉원 대만 총통이 2016년 집권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지 모를 일이다. 결과적으로 총 30년의 우여곡절 끝에 동성결혼이 법률상 인정받게 됐다.
치자웨이의 다음 싸움을 준비 중이다. 동성혼이 법제화되었지만 대만 내에서 동성애 혐오나 차별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어쩌면 이 투쟁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그를 주목해야 한다. 인권은 타협이나 절충할 수 있는 상대적인 가치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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