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호암아트홀(옛 중앙일보 서소문 사옥, 삼성생명빌딩)에 설치됐던 배달 소년상이 지난 9일 철거됐다. 이 소년상은 현재 중앙일보 지면 등을 인쇄하는 자회사 미디어프린팅넷 부산공장 주차창 한쪽에 방치되어 있다. 33년 세월을 같이하며 중앙일보의 상징이었던 소년상이 어쩌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유배 오게 됐을까.
◇ 대기업 언론의 탄생
이를 설명하기 위해선 먼저 중앙일보와 삼성의 오랜 인연을 살펴봐야 한다. 중앙일보는 1965년에 삼성그룹 창업주인 이병철 회장에 의해 창간됐다. 1968년 자신의 3남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장인인 홍진기에게 회장자리를 넘긴 이후에도 대기업과 언론은 줄곧 협력 관계를 이어왔다. 이후 중앙일보 경영권을 이어받은 홍석현 중앙일보·JTBC 전 회장은 '삼성 X파일 사건'을 겪는다. 홍 전회장이, 당시 이학수 삼성그룹 비서실장과 1997년 정치자금 액수와 전달방법을 논의했으며 삼성의 기아자동차 인수문제를 놓고 정치권과 협상하는데 중재 역할을 했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2년 뒤 중앙일보는 삼성의 소유구조에서 공식적으로 벗어났지만 당시 홍 전회장의 중앙일보 지분 매입 여력을 놓고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다.
소년상이 있던 삼성생명 일보빌딩(호암아트홀)은 본래 중앙일보의 건물이었으나 1998년 신문사가 삼성그룹과 분리되면서 삼성생명에 넘어갔다. 이름도 중앙일보 빌딩에서 삼성생명 일보빌딩으로 변경됐다. 그 이후 중앙일보는 빌딩을 임대해 사옥으로 사용했다.
◇ 대기업과 언론 사이의 균열
삼성그룹과 중앙일보의 관계는 2013년 손석희 JTBC보도담당 사장이 취임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JTBC는 중앙일보와 달리 삼성과 관련된 내용을 여과없이 보도해 눈길을 끌었다. 메르스 사태 때는 삼성병원의 질병 확산 책임 문제를 끈덕지게 지적해 결국 이재용 부회장이 대국민 사과를 해야 했다. 또 삼성전자 반도체공장 노동자 백혈병 문제와 노조 무력화 문건을 보도했다. 삼성의 가장 아픈 부분이었다. 다른 언론들도 알고 있었지만 보도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사안이었다.
JTBC는 지난해 하반기 ‘최순실 태블릿PC’와 ‘삼성물산 합병 문서’ 등을 잇달아 단독 보도했다. 이런 보도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올해 2월 구속된 데 이어 8월 징역 5년의 실형을 선고받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삼성 내부에서 중앙일보 책임론이 나온다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우연일까, 이 부회장의 외삼촌이자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매형인 홍 전회장이 올해 3월 스스로 회장직에서 물러났다. 홍 전회장은 석달 뒤 일보빌딩의 이병철 회장 집무실을 떠난다. 중앙일보(2012년)와 JTBC(2015년)가 각각 본사를 이전한 이후에도 계속 사용하던 사무실이었다. 현재 이 빌딩에는 지하 1층 JTBC 스튜디오만 남았다.
◇ 소년은 왜 온몸을 가린 채 거기에 서 있었을까
올해 들어 중앙일보와 JTBC의 삼성광고가 눈에 띄게 줄기 시작했다. 다른 언론사도 줄었지만, 중앙일보의 경우 삼성 광고비중이 상당히 높았다. JTBC는 연평균 100억원, 중앙일보는 그 이상으로 알려졌다. 이렇다 보니 중앙일보의 타격이 컸다. 중앙일보는 이달 6일 조직개편 설명회를 열고 중앙일보 소속인 중앙SUNDAY를 계열사인 중앙일보플러스 소속으로 전환한다는 방침을 밝혔다. 인력 조정으로 인건비 부담을 줄여 위기를 극복하자는 취지였다.
삼성그룹은 중앙일보 조직개편 발표 3일 뒤 삼성생명일보빌딩 앞 소년상을 철거했다. 소년상은 33년간 머물렀던 자리를 떠나 너무나 먼 곳으로 치워졌다. 부산의 중앙일보 자회사 주차장 한 귀퉁이에 포장 덮개가 씌워져 발만 드러낸 채 서 있었다. 때마침 매서운 한파는 한국 언론의 기온을 느끼게 했다. 이 땅의 신문과 기업의 우여곡절을 드러내는 참으로 처연한 장면 하나. 독자님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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