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경제 회복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 경제가 흔들리고 있다. 미·중 무역전쟁의 여파로 제조업이 타격을 받은 가운데 이탈리아 예산안 갈등 같은 지정학적 우려가 높아지면서 경제 성장률이 정체하고 있는 탓이다. 현행 완화 기조를 유지하기로 했던 유럽중앙은행(ECB)의 고민이 깊어질 전망이다.
◆ 유로존 성장률 4년 만에 최저치..."중국 경기 둔화 영향"
유럽연합(EU) 통계기구인 유로스타트에 따르면 올해 3분기 유로존 경제성장률은 전분기 대비 0.2% 수준으로 전망치를 밑돌았다. 2014년 2분기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이다. 전년 동기 대비 성장률도 1.7% 성장에 그쳐 시장 전망치(1.8%)에 미치지 못했다. 유로존 내 2위 경제 규모인 프랑스의 성장률은 0.4%로 전망치(0.5%)를 밑돈 것으로 나타났다. 내년 예산안을 두고 EU와 대립하고 있는 3위 경제 이탈리아의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0.0%대에 머물렀다.
외신들은 미·중 무역전쟁이 격화되는 가운데 중국 경제가 둔화하면서 유로존 경제에 타격을 준 것으로 보고 있다. 중국 국가통계국에 따르면 중국의 올해 3분기 GDP 성장률은 6.5%로, 전망치(6.6%)를 밑돌았다. 직전 분기 대비 0.2%p 낮은 수준으로, 2009년 이후 최저치다. 중국의 올해 4분기와 내년 1분기 GDP 성장률은 각각 6.4%, 6.3%에 머물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고 블룸버그통신은 전했다.
중국 10월 제조업 구매관리자지수(PMI)는 2016년 7월 이후 2년 만에 가장 낮은 50.2로 집계됐다. 경기 위축 여부를 알 수 있는 지표인 50에 수렴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과 관세 폭탄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미·중 무역전쟁의 충격이 가시화된다는 평가가 나오는 가운데 마땅한 해소 방법도 없어 부정적인 경제 성적이 당분간 유지될 것이라는 비관론도 나온다.
중국 경제 둔화의 여파는 당장 유로존 최대 경제국인 독일에도 타격을 입혔다. IHS 마킷에 따르면 독일의 10월 PMI 지수는 52.7로 전월 대비 2.3포인트 낮아졌다. 민간 부문 활동은 2015년 이후 가장 약세를 보였고 4년 만에 공장 가동도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유럽 역내 배기가스 기준이 높아지기도 했지만 중국을 비롯한 신흥국 경제가 불안한 모습을 보이면서 생산에 차질을 빚었다는 것이다.
독일상공회의소(DIHK)는 올해 성장 전망치를 낮춘 뒤 내년 경제 둔화를 예고하면서 2019년 경제 성장률을 시장 전망치보다 낮은 1.7% 수준으로 내다봤다. 스웨덴 금융그룹인 노르디아의 수석 전략가인 얀 본 예리크는 "유로존은 분명 무역 전쟁으로 인한 불확실성과 세계 경제 성장 모멘텀으로 고통 받고 있다"며 "경제 약세가 확산되는 가운데 취약한 PMI자료가 유로존 경제 하방 위험을 높이고 있다"고 진단했다고 로이터통신은 전했다.
◆ ECB, 현행 완화 기조 유지 결정..."출구 전략 어쩌나"
ECB가 불과 일주일 전에 현행 완화 기조를 유지하겠다고 밝힌 가운데 유로존 경제 둔화 가능성이 표면에 드러나면서 출구 전략 시기를 두고 ECB의 고민이 깊어질 것으로 보인다. 파이낸셜타임스(FT) 등 외신 보도에 따르면 마리오 드라기 ECB 총재는 10월 25일(이하 현지시간) 기자회견을 통해 최근 리스크를 감안해 현행 정책을 유지할 것이라고 밝혔다. 현재 ECB의 기준금리는 0%이고 예금금리와 한계대출금리는 각각 -0.40%, 0.25%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문제는 유로존 경제에 부담을 줄 수 있는 요소가 산재해 있다는 점이다. 먼저 이탈리아와 EU 간 갈등이 해소되지 않고 있다. 앞서 이탈리아 정부는 올해 1.6% 수준이던 GDP 대비 재정적자 규모를 내년에 2.4%로 확대하는 것을 골자로 한 예산안을 발표했다. EU는 이탈리아 채무 위기 가능성을 우려하며 수정 예산안을 제출하라고 요구했지만 이탈리아는 당초 예산안을 고수한다는 방침이다. 불안감이 고조되면서 30일 이탈리아 국채금리는 장중 3.5%까지 오르면서 고점을 경신했다.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 불확실성이 높아진 가운데 제조업 경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국제유가 변동성, 신흥시장 취약성 등도 유로존 경제 하방을 부추길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당초 올해 유로존 성장률을 지난해 수준인 2.4%로 내다봤던 ECB조차 현재 전망치를 2.0%까지 하향 조정한 상태다. 연말까지 ECB의 유로존 성장률 전망치는 추가로 하향 조정될 수 있다고 시장 전문가들은 지적하고 있다.
FT는 유로존 경제가 4년 만에 약세를 나타낸 만큼 ECB에 대해 금융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현행 정책을 재평가해야 한다는 압박이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캐피털 이코노믹스의 제시카 힌즈 유럽 이코노미스트는 "ECB가 올해 자산매입을 종료한다는 계획을 고수할 것으로 보인다"며 "다만 최근 잇따라 나온 데이터가 취약하다는 점에서 볼 때 ECB의 긴축정책은 향후 지표들에 따라 달라질 것이라는 점을 강조할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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