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65년 체제'는 한국 역사의 아픈 상처다. 과거 강제징용부터 현재 한·일 경제전쟁의 한가운데를 관통한다. 박정희 정권 때 맺은 한·일 청구권 협정은 '3억달러 무상자금·2억달러 차관'과 '대일 청구권 포기'를 맞바꾼 굴욕 외교의 상징으로 꼽힌다. 5·16 쿠데타 이후 협상을 재개한 65년 체제 자체가 경쟁 열위에서 만들어진 '불평등한 협정'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65년 체제 청산론'의 핵심이다. 역사의 '리셋 증후군'을 경계하자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이에 아주경제는 총 4회 기획을 통해 '포스트 65년 체제'를 모색한다. <편집자 주>
'불평등한 협정이냐, 불가피한 협정이냐.' 65년 체제가 반세기 만에 시험대에 올랐다. 이는 단순히 한·일 양국의 관계를 넘어 주요 2개국(G2)의 관계설정과 직결된 변곡점이다. 65년 체제는 냉전 시대 미국의 아시아 지배 전략의 하위 구조 역할을 했다. 우리의 '65년 체제 유지냐, 아니냐'에 따라서 '한·미·일 동맹이냐, 한·중 신(新) 체제냐'가 결정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얘기다. 65년 체제의 청산은 미국 주도의 '삼각 동맹 체제'에 마침표를 찍는 것을 의미한다.
◆美아시아 지배전략 하에 이뤄진 韓·日협정
11일 전문가들에 따르면 한·일 청구권협정 중심에는 연합국과 일본 간 전후 처리 협상인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1951년 9월)'이 자리 잡고 있다. 애초 시작도 이승만 정권 때인 1951년 11월 미국 주도로 이뤄졌다. 한국은 1948년부터 식민지 피해 등에 관한 배상문제를 검토했지만, 7년간 미군정의 지배를 받은 일본이 주권 회복 전이라 협상을 할 수 없었다.
문제는 한국이 영·일의 반대에 부딪히면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회의에 빠졌다는 점이다. 일본에 대한 교전국 입장에서 전쟁배상 문제를 논의할 기회를 실기한 셈이다. 길고 긴 한·일 회담의 시초였다. 당시는 미·소 냉전 체제였다. 한·일 청구권협정에는 양국을 '대(對) 소련 방패막'으로 삼으려는 미국의 동북아 안전보장체제 속내가 깔렸다.
이 과정에서 일본은 미국의 보호 아래 청구권 문제를 제기했다. 미국 주도의 국제질서 편입과 경제개발 자금 수혈 등이 필요했던 박정희 정권은 1964년 6월3일 비상계엄령까지 발동하면서 한·일 협정에 반대하는 학생들을 진압했다. 이들이 이른바 6·3 세대다.
일본이 청구권협정 과정에서 우리 측에 식민지 수탈에 대한 불법성 공식 인정 등을 하지 않은 것도 이런 까닭이다. 국제통상 전문가인 송기호 변호사(법무법인 수륜아시아)는 이날 아주경제와 통화에서 "식민지배 불법성을 비롯해 강제징용 피해자와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인권 등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매우 불충분한 협정이었다"라고 밝혔다.
◆배상 문제 포기한 中…불완전한 협정한 韓
이 같은 불안전한 협정으로 △강제징용 피해자 개인 청구권 포함 여부 △1965년 3억달러 성격 △보상·배상 차이 △일본 기업의 배상 당위성 등이 반세기가 넘은 지금껏 미완의 과제로 남았다.
이 중 핵심 쟁점인 강제징용 피해자 개인 청구권 포함 여부는 '국가권력이 통제한 반인도적 불법행위'에 개인의 손해배상청구권을 인정할 수 있느냐의 문제와 맞물린다. 지난해 대법원은 이를 인정했다. 정부의 입장도 마찬가지다.
한·일 양국이 청구권 협정 제2조1항과 2항을 놓고 치열한 법적해석 다툼을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협상의 부재력을 지적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이신화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중국처럼 전쟁 피해 배상권을 포기하고 공적개발원조(ODA) 방식으로 받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중국은 40년간 약 3조5000억엔을 일본으로부터 받았다. 필리핀과 인도, 베트남 등도 중국 모델을 차용했다.
하지만 호사카 유지 세종대 대양휴머니티칼리지 교수는 "개인청구권은 국제법적으로 순수하게 소멸될 수 없다"며 "(한·일 청구권 협정은) 국가 대 국가가 약속한 것일 뿐, 개인은 포함돼 있지 않다"고 반박했다.
◆"아베 정권, 불법성에 대한 배상 무시"
65년 체제 당시 정부가 받은 3억 달러의 성격도 쟁점이다. 이는 참여정부 때인 2005년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위원장으로 참여한 민관공동위원회와 직결한 문제다.
일본은 당시 민관공동위원회가 무상 3억 달러에 대해 "청구권, 강제동원 피해보상 문제 해결 성격의 자금 등이 포괄적으로 감안돼 있다고 봐야 한다"고 밝힌 점을 들어 강제징용 피해가 마무리됐다고 주장하지만, 여전히 개인청구권과는 별개라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실제 당시 국무조정실이 발표한 4쪽짜리 보도자료에는 개인 손해배상 청구권 내용은 없다. 다만 "한·일 협상 당시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가 강제동원의 법적 배상·보상을 인정하지 않음에 따라 고통받은 역사적 피해사실에 근거해 정치적 차원에서 보상을 요구했다"며 "이러한 요구가 양국 간 무상자금 산정에 반영됐다고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참여정부가 특별법 제정을 통해 피해자 7만2631명에게 위로금 6184억원을 지급한 것도 한·일 갈등의 불씨로 남았다.
강제징용 쟁점을 한 줄로 요약하면, 한·일 청구권협정이 '국가적 보상·개인적 배상을 포괄하느냐, 별개의 문제냐'다. 배상은 불법행위로 발생한 손해를 갚는 행위다. 보상은 적법 행위로 발생한 손실을 갚는 것이다.
호사카 교수는 "당시 임금차별과 강제노역 과정에서 발생한 폭행 등 불법적인 것에 대한 배상은 이뤄지지 않았다"며 "일본 변호사들도 인정한 이런 문제를 아베 신조(安倍晋三) 내각이 무시한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일본이 직접적인 배상금 지급에 선을 긋는 만큼, 양국 외교 협상 전 '1+1(한·일 기업 공동지급), '2+1(한·일 기업과 한국 정부 지원)' 등은 한발도 나아가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美아시아 지배전략 하에 이뤄진 韓·日협정
11일 전문가들에 따르면 한·일 청구권협정 중심에는 연합국과 일본 간 전후 처리 협상인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1951년 9월)'이 자리 잡고 있다. 애초 시작도 이승만 정권 때인 1951년 11월 미국 주도로 이뤄졌다. 한국은 1948년부터 식민지 피해 등에 관한 배상문제를 검토했지만, 7년간 미군정의 지배를 받은 일본이 주권 회복 전이라 협상을 할 수 없었다.
문제는 한국이 영·일의 반대에 부딪히면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회의에 빠졌다는 점이다. 일본에 대한 교전국 입장에서 전쟁배상 문제를 논의할 기회를 실기한 셈이다. 길고 긴 한·일 회담의 시초였다. 당시는 미·소 냉전 체제였다. 한·일 청구권협정에는 양국을 '대(對) 소련 방패막'으로 삼으려는 미국의 동북아 안전보장체제 속내가 깔렸다.
일본이 청구권협정 과정에서 우리 측에 식민지 수탈에 대한 불법성 공식 인정 등을 하지 않은 것도 이런 까닭이다. 국제통상 전문가인 송기호 변호사(법무법인 수륜아시아)는 이날 아주경제와 통화에서 "식민지배 불법성을 비롯해 강제징용 피해자와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인권 등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매우 불충분한 협정이었다"라고 밝혔다.
◆배상 문제 포기한 中…불완전한 협정한 韓
이 같은 불안전한 협정으로 △강제징용 피해자 개인 청구권 포함 여부 △1965년 3억달러 성격 △보상·배상 차이 △일본 기업의 배상 당위성 등이 반세기가 넘은 지금껏 미완의 과제로 남았다.
이 중 핵심 쟁점인 강제징용 피해자 개인 청구권 포함 여부는 '국가권력이 통제한 반인도적 불법행위'에 개인의 손해배상청구권을 인정할 수 있느냐의 문제와 맞물린다. 지난해 대법원은 이를 인정했다. 정부의 입장도 마찬가지다.
한·일 양국이 청구권 협정 제2조1항과 2항을 놓고 치열한 법적해석 다툼을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협상의 부재력을 지적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이신화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중국처럼 전쟁 피해 배상권을 포기하고 공적개발원조(ODA) 방식으로 받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중국은 40년간 약 3조5000억엔을 일본으로부터 받았다. 필리핀과 인도, 베트남 등도 중국 모델을 차용했다.
하지만 호사카 유지 세종대 대양휴머니티칼리지 교수는 "개인청구권은 국제법적으로 순수하게 소멸될 수 없다"며 "(한·일 청구권 협정은) 국가 대 국가가 약속한 것일 뿐, 개인은 포함돼 있지 않다"고 반박했다.
◆"아베 정권, 불법성에 대한 배상 무시"
65년 체제 당시 정부가 받은 3억 달러의 성격도 쟁점이다. 이는 참여정부 때인 2005년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위원장으로 참여한 민관공동위원회와 직결한 문제다.
일본은 당시 민관공동위원회가 무상 3억 달러에 대해 "청구권, 강제동원 피해보상 문제 해결 성격의 자금 등이 포괄적으로 감안돼 있다고 봐야 한다"고 밝힌 점을 들어 강제징용 피해가 마무리됐다고 주장하지만, 여전히 개인청구권과는 별개라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실제 당시 국무조정실이 발표한 4쪽짜리 보도자료에는 개인 손해배상 청구권 내용은 없다. 다만 "한·일 협상 당시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가 강제동원의 법적 배상·보상을 인정하지 않음에 따라 고통받은 역사적 피해사실에 근거해 정치적 차원에서 보상을 요구했다"며 "이러한 요구가 양국 간 무상자금 산정에 반영됐다고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참여정부가 특별법 제정을 통해 피해자 7만2631명에게 위로금 6184억원을 지급한 것도 한·일 갈등의 불씨로 남았다.
강제징용 쟁점을 한 줄로 요약하면, 한·일 청구권협정이 '국가적 보상·개인적 배상을 포괄하느냐, 별개의 문제냐'다. 배상은 불법행위로 발생한 손해를 갚는 행위다. 보상은 적법 행위로 발생한 손실을 갚는 것이다.
호사카 교수는 "당시 임금차별과 강제노역 과정에서 발생한 폭행 등 불법적인 것에 대한 배상은 이뤄지지 않았다"며 "일본 변호사들도 인정한 이런 문제를 아베 신조(安倍晋三) 내각이 무시한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일본이 직접적인 배상금 지급에 선을 긋는 만큼, 양국 외교 협상 전 '1+1(한·일 기업 공동지급), '2+1(한·일 기업과 한국 정부 지원)' 등은 한발도 나아가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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