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 폐위 쿠데타는 농락당한 누이 복수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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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재 논설고문
입력 2019-12-03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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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연산군을 몰아낸 박원종의 묘와 궁마을 · 황호택(서울시립대) 이광표(서원대) 교수 공동 집필 

1506년(연산군 12) 반정군(反正軍)이 한양도성으로 밀고 들어오자 궁궐을 지키던 군사들과 시종, 환관들은 바깥 동정을 살핀다는 핑계로 차차 흩어져 수채구멍으로 달아나기에 바빴다. 황망한 나머지 더러는 실족해 뒷간에 빠지는 자도 있었다. 반정군이 청덕궁 근처에 도착했을 때는 도성 안 사람들이 나와 거리를 메우고 환호를 보냈다. 반정은 '옳지 못한 임금을 폐위하고 새 임금을 세워 나라를 바로잡는다'는 뜻인데 거사가 성공하면 반정이고 실패하면 역모(逆謀)가 됐다.
반정군이 궁궐에 진입한 후 박원종은 정현왕후(연산군의 생모 윤씨가 폐비된 후에 들어온 성종의 계비)를 알현하고 “임금이 도리를 잃어 정치가 혼란하고 민생이 도탄에 빠졌다”며 진성군(중종·정현왕후의 아들)을 왕으로 추대하는 교지를 받아냈다. 중종은 박원종 누이의 사위였다. 박원종은 대비의 교지를 들고 연산군의 침전으로 가 "옥새를 내놓으라"고 소리쳤다. 연산군은 벌벌 떨면서도 옥새를 틀어쥐고 버텼다. 박원종은 반정군에게 "임금을 끌어내라"고 명령했고 칼을 뽑아든 군사들이 연산군을 위협해 옥새를 빼앗았다.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도곡리 금대산 자락에는 성종 연산군 중종 대에 걸쳐 굵고 짧은 삶을 살다간 평성부원군 박원종(1467~1510)의 묘소가 있다. 대리석 신도비는 마모가 상당히 진행돼 글씨가 육안으로 잘 보이지 않지만 비석의 머리에 새겨진 용 두 마리는 살아 있는 듯 정교하다. 신도비의 비문은 당대 최고의 문장가인 신용개(申用漑)가 짓고 썼다. 작은 글씨체가 예쁘다.

박원종 묘 옆에 서있는 문인석. 왕릉의 문인석보다 장대하다. 부인 묘가 뒤에 있는 상하분이다.[사진=김세구 전문위원]


박원종 묘의 문인석(文人石)은 왕릉의 문인석보다 더 크고 허리띠의 무늬도 선명하다. 부인 묘가 남편의 뒤에 있는 상하분(上下墳)이다.

박원종(1467~1510)은 병조판서를 했던 박중선의 외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박중선의 신도비도 아들 묘역에서 조금 떨어진 좌측에 있다. 박원종의 할아버지인 박거소는 심온의 사위로 세종과는 동서지간이었다. 박원종은 대대로 왕가에 딸을 출가시키는 무인 집안에서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외동 아들이었다. 원종의 첫째 누이는 월산대군의 부인이었고, 다섯째는 장경왕후(중종비)를 낳았으며, 일곱째는 제안대군의 부인이었다.

활쏘기와 말타기의 실력이 출중해 성종 17년에 선전관으로 있을 때 무과에 급제해 왕을 측근에서 모셨다. 월산대군은 아들이 없어 처남인 박원종을 친동생처럼 사랑했다. 성종은 월산대군이 일찍 죽은 것을 안타까워 해 대간들이 반대하는데도 박원종을 젊은 나이에 승지로 발탁했다.
박원종은 연산군 시대에도 승승장구했다. 연산군은 어릴 때 잔병치레가 잦아 백부인 월산대군의 사저(현재의 덕수궁)에 가서 자주 요양을 했다. 박원종의 큰누나였던 박씨는 연산군의 숙모였다. 연산군은 왕이 되자 박씨가 세자를 맡아 기르게 하고 세자가 커서 궁으로 돌아올 때 박씨도 같이 들어오게 했다.

연산군이 사냥과 유흥을 즐기는 곳에 일반의 출입을 엄금한 금표비. 비문에는 이 금표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은 왕명을 어긴 것으로 보아 처벌을 할 것이라는 내용이 적혀있다.[문화재청 제공]


잘나가던 박원종은 1506년 경기관찰사로 나갔다가 연산군의 미움을 받아 삭직(削職)됐다. 박원종이 연산군의 눈밖에 난 것은 사냥을 좋아하는 연산군이 금표(禁標)를 세우고 백성을 어렵게 하는 일을 간했기 때문이다. 연산군일기(연산 12년 2월 26일) 에 따르면 박원종이 “사냥 몰이꾼을 개성에서 뽑아왔고 역들의 말들도 많이 왔는데, 중국 사신이 오는 게 박두하였으니 어찌하오리까”하고 아뢰자 연산군이 “중국 사신이 온다고 그만둔다면 이보다 더 급한 일이 있을 경우에는 또 그만들 것인가”라며 화를 냈다. 연산군은 왕명의 출납을 맡아보던 정원(政院)에 전교하기를 “전에 송질이 감사를 할 때는 사냥을 위한 금표에 관해 아무 말이 없었는데 요사이 원종은 금표 세운 것이 들어갔다 나왔다느니, 새 길을 내자느니 같은 일로 와서 아뢰더니 지금 또 사신 이야기를 하니 옳지 못하다”고 심기가 불편함을 드러냈다. 연산군은 사냥 마니아여서 도성 밖 30리에 금표를 세우고 민가를 철거해 사냥터로 만들어 백성들의 원망이 하늘을 찔렀다.

연산의 도 넘는 失政과 악행에 누이까지 간통 추문 불명예
바른말 하다 파직당한 성의한 신윤무 등과 함께 거사 준비
반정군, 임금 옥새 빼앗고 폐위···연산, 그해 유배지서 숨져 


조선왕조실록 연산군 일기의 마지막 기사(1506년.연산 12년 9월2일)는 연산군에 대한 기소장과 같다. 그의 악행은 동서고금의 폭군열전에 집어넣기에 아무런 모자람이 없다. 연산군의 아버지 성종은 연산군을 못마땅하게 여기면서도 생모(폐비 윤씨로 사사됨) 없이 자란 것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 차마 세자를 폐(廢)하지 못했다. 연산군은 왕위에 오르자 언로(言路)를 막고 날로 음란방탕이 심해지면서 광포한 고문과 살상을 일삼았다. 채홍사(採紅使)들이 전국 팔도에서 자태가 고운 여자들을 찾아내 운평 흥청이라는 명칭의 궁궐기녀로 선발했다. 심지어는 궁중의 연회에 종친이나 신하의 아내를 참석시켜 밤을 새워 추문이 파다할 정도였다. 학정을 비방하는 한글투서가 출현하자 '언문구결(諺文口訣)'이 붙은 책을 불태우고 한글 사용을 금지했다.
박원종은 왕에게 바른 말을 하다 파직된 전 이조참판 성희안과 한 마을에 살았다. 그들은 만나면 늘 “나라의 법도가 무너지고 백성이 도탄에 빠져 종묘사직이 전복될 위기에 처했는데 대신들은 왕의 말을 받들기에만 바쁘다. 우리가 성종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는데 차마 앉아서 보고만 있어야 하겠는가”라고 탄식했다. 이들은 반정 거사에 군자감(軍資監)부정(副正) 신윤무와 인망이 높던 이조판서 유선정 등을 끌어들였다. 신윤무가 “왕의 좌우에 있는 측근들까지 마음이 떠나 사직이 장차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갈 것”이라고 말하자 박원종이 거사를 결정했다고 연산군일기는 기록했다.
근정전에서 중종이 백관의 하례를 받고 전왕을 폐위해 연산군으로 강봉(降封)하고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했다. 연산군은 그해 유배지에서 죽었다. 반정군의 군사들은 군기시(軍器寺) 앞에서 연산군의 후궁 장녹수, 전숙원, 백견의 목을 잘랐다. 장녹수와 전숙원은 벼슬을 팔며 남의 재물을 빼앗고 종친이나 경대부들에게도 함부로 모욕을 줄 정도였다.
영화와 드라마에 자주 등장한 장녹수는 본래 제안대군(齊安大君)의 여종으로 연산군의 후궁으로 입궐하기 전에 제안대군의 남자종에게 시집가 자식 하나를 두었다. 뒤에 가무(歌舞)를 익혀 이름을 떨쳤고 용모가 뛰어나 연산군에 발탁되어 총애를 받아 무수한 금은보화와 노비 전택(田宅)을 하사받았다. 연산군은 장녹수의 치마폭에 빠져 상주고 벌주는 것이 모두 그녀의 입에서 나왔다. 도성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목이 잘린 장녹수와 후궁들에게 기왓장과 돌멩이를 던지면서 “일국의 고혈이 여기서 탕진됐다”고 소리쳤는데 잠깐 사이에 돌무더기를 이루었다( 연산군 일기).
박원종의 맏누이는 천하절색으로 연산군과 간통하며 늘 궁중에 머물렀다고 중종실록의 박원종 졸기(卒記·중종 5년 4월 17일)에 기록돼 있다. 박원종은 이를 분히 여겨 누나에게 "왜 참고 사는가. 약을 마시고 죽으라"고 말한 적도 있다. 연산군은 박씨에게 자주 고가의 물품을 하사했다. 연산 12년 7월 20일 연산군일기의 기사는 박씨의 죽음을 전하면서 ‘사람들이 왕에게 총애를 받아 잉태하자 약을 먹고 죽었다고 말했다’고 적고 있다. 박원종이 반정에 적극 가담한 데는 누나를 농락해 집안과 자신에 불명예를 안겨준 연산군에 대한 복수 심리도 작용한 것 같다.

박원종의 저택과 활터가 있었던 도곡3리. 궁(弓)마을이라는 비석이 서있다.[사진=김세구 전문위원]


박원종의 저택이 있었던 남양주시 와부읍 도곡리는 일명 ‘궁(弓)말’이라고 불린다. 예봉산 자락 어룡마을 개천 변에 식당을 증축할 때 다수의 청자와 석재들이 나왔다고 한다. 광해군 시대를 산 문인 허균의 시문집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도산(陶山) 박(朴)씨의 산장기(山莊記)' 편에 박원종 저택의 호화스런 옛 자취를 더듬는 글이 나온다.
<서울 동대문에서 40리 떨어진 도산에 박원종의 고손자 몽필이 살고 있다. (광해군 1년)에 성묘를 갔다가 그의 집에 묵게 되었는데 후하게 대접했다. 몽필은 “두루 10리 안이 모두 조상의 세업(世業)입니다. 태평시절에는 인가 수백 가구가 다 노비였죠"라고 말했다. 그를 따라 집 뒤 언덕을 올랐는데 옛날의 연못과 누대는 흩어졌으며 가시덤불이 우거져 무너진 담과 깨진 주춧돌이 쓸쓸한 안개와 야생 덩굴 사이에 남아 있었다. ">
허균은 박원종에 대해 백성들을 도탄에서 벗어나게 한 업적이 종묘사직에 영향을 미쳤고 부귀영화는 그런 노력의 보답이었다고 호의적으로 논평했다. 박원종의 묘지명(墓誌銘)에는 공은 신장이 육척(1척은 30.3㎝)이고 풍채가 당당했다고 써있다.
조선조에서 무과 출신으로 영의정이 된 사람은 박원종과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이준 두 사람뿐이다. 그러다보니 문신들 중에 그를 좋아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았다. 중종실록의 사관은 박원종 졸기에 "뇌물이 사방에서 모여들고 남에게 주는 것도 지나쳤다. 남에게 이기기를 좋아하여 임금 앞에서도 말과 얼굴빛에 표시가 났다. 연산의 궁궐에서 나온 이름난 창기(娼妓)들을 많이 차지해 여종으로 삼고 별실을 지어 살게 했으며 거처와 음식이 분수에 넘쳐나 사람들이 그르게 여기었다"고 적었다.
 

  박운의 묘표에 있는 삼족오(三足烏)는 날렵하고 세 발이 선명하다. [사진='한민족과 해 속의 삼족오' 저자 김주미 박사].


박원종은 43세를 일기로 죽은 뒤 중종 묘정에 배향(配享)되었다. 중종은 박원종에 무열(武烈)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중종은 뒤에 무열보다 더 격이 높은 충열(忠烈)로 시호를 고쳐 내렸다.
박원종의 묘 앞에는 서자인 박운의 묘가 있다. 박원종은 정실(正室) 파평 윤씨와의 사이에서 자식을 두지 못했다가 두번째로 맞은 창녕 성씨로부터 박운을 얻었다. 조선시대 양반가에선 적자가 없으면 보통 양자를 들였는데 박원종은 재산과 가계를 서자에게 물려주었다. 박운은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아 82세까지 장수했다. <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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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지원-남양주시(시장 조광한)
협찬-MDM 그룹(회장 문주현)
도움말-남양주시립박물관 김형섭 학예사


<참고문헌>
1.조선왕조실록(성종, 연산군, 중종)
2.민족문화대백과사전
3.조선조 영의정 박원종 연구, 박상진 저, 국학자료원
4.역사적 사건의 콘텐츠화 과정 연구 - 중종반정을 중심으로, 차주영 저, 인문콘텐츠 2007년 12월(인문콘텐츠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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