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리대첩의 김좌진 장군, 봉오동 전투의 홍범도 장군을 휘하에 거느리고 간도 지역에서 항일 무장투쟁의 선봉에 섰던 백포(白圃) 서일(1881~1921) 장군을 조명한 책 <항일무장투쟁의 별, 대한군정서 총재 서일>(경인문화사 출간, 2019.12)이 발간됐다. 칠순을 넘긴 정길영 박사의 집요한 연구가 항일 무장 투쟁사 수장의 감춰진 생애에 빛을 드리운 것이다.
이후 그는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에서 박사 과정에 등록하며 본격적으로 서일 연구에 매진했다. 7급 농촌지도직으로 시작해 2006년 농촌진흥청에서 퇴직하기까지 평생을 공무원으로 살던 그가 뒤늦게 간도 항일 투쟁사의 숨겨진 영웅에 빠져들었고, 10년의 연구로 감춰졌던 서일의 생애 면면이 밝혀졌다.
서일은 대종교 중광교조였던 홍암 나철을 만나 감화를 받고 대종교 포교를 통한 항일무장 투쟁의 거점을 마련한 인물이다. 단군민족 정신을 항일무장투쟁의 원동력으로 삼고 일본으로부터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길은 전쟁밖에 없다는 신념으로 10년 동안 강력한 군대를 조직해 1920년 간도에서 벌어진 일본과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서일이 관여한 간도의 대일항쟁 기지는 처음 대종교를 중심으로 한 중관단에서 출발해 그 세력을 점차 확대해갔다. 대한정의단부터는 종교단체에서 벗어났고, 이후 대한군정서로 확대 개편하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규군으로 거듭났다.
당시 임시정부 기록에는 “대한군정서를 중심으로 10개 독립군 단체가 병력 3500명으로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했다. 서일을 총재로 추대하고 부총재에 홍범도, 김좌진, 조성환, 총사령 김규식, 참모총장 이장녕, 여단장 이청천으로 꾸렸다”고 서술돼 있다. 간도 항일무장투쟁의 실질적 지도자가 서일이었음이 나타난다. 서일은 비밀리에 동원당, 자유공단을 운영하며 대일항쟁을 지원했다.
하지만 1920년 자유시 참변을 겪으면서 항일무장투쟁이 좌초됐다. 서일은 자유시로 가지 않고 수십명을 모아 밀산에서 군사훈련을 하며 후일을 도모했지만 자유시 참변 소식을 들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죽음으로 간도 지역의 항일무장투쟁은 급속도로 위축됐다.
정 박사는 “연구자들이 김좌진, 홍범도, 이범석 등의 업적만을 집중적으로 연구한 결과 항일무장투쟁사의 중심이었던 서일 총재의 업적이 가려졌다”며 “일본 기록을 보면 자유시 참변으로 독립군 단체들이 와해되기 전 서일이 홀로 공산당과 고군분투했다고 하는데, 앞으로 그 전후사정을 연구하면서 그의 애국애족 정신을 알리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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