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 (22)오직 오늘을 똑바로 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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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논설실장
입력 2020-02-19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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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남선이 신음소리를 냈다면, 나는 곡소리를 냈다

[다석 류영모]

세상의 명망이란 무엇인가

일제강점기 때 걸출한 신학자 종교인이었던 김교신은 "1910년대 당시 뭇사람들이 세 사람을 가리켜 하늘이 낸 삼천재(三天才)라 불렀다"고 말했다. 최남선과 류영모, 그리고 이광수가 그 세 사람이다.

최남선과 류영모는 1890년생으로 동갑이었고, 이광수는 두 살 아래인 1892년생이었다. 지금 돌이켜봐도 최남선과 이광수의 이름은 후인들의 기억 속에 크고 깊이 남아 있지만, 류영모는 그에 비하여 세상의 명망에서 벗어난 이름에 가깝다.

류영모와 동시대에 활동하던 20대 시절의 민족지도자이자 시대선구자였던 최남선과 이광수는 그러나 혹독한 시련의 시기에 이름을 더럽혀 그 '하늘의 재능'마저 겨레가 뱉는 침 아래 놓이는 지경이 됐다. 안타깝고 아픈 역사다.

류영모는 그때도 자신이 믿는 한길을 걸었고 돌아간 지금까지도 오롯한 그 한길을 남겨 겨레가 새롭게 살펴야 할 '큰 길'이 되었지만, 젊은 그때도 구순(九旬)을 넘겨 눈을 감을 때에도, 그 뜻을 받든 제자들의 길에서조차도, 굳이 이름을 얻고자 애쓰지 않고 이름을 남기고자 공을 들이지 않았다. 대신 류영모는 그 이름보다 큰 것에 마음을 두었다. 지금-여기-나를 이루는 '존재의 의미'를 집요하고도 치열하게 탐구했을 뿐이다.

류영모는 세상이 최남선과 이광수를 향해 갈채를 보내고 존경을 드러낼 때에도 담담했고, 다시 세상이 그 갈채와 존경을 거둬들여 천하의 민족배신자로 손가락질할 때에도, 처음에 이뤄냈던 일의 진정성까지 매도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들이 시대를 이끌 만큼 재능이 뛰어났지만 성정(性情)이 굳지 않아 엇길로 빠진 것을 안타까워할 뿐이었다.
 

[육당 최남선]



한국 첫 출판사 '신문관'과 잡지 '소년'

최남선은 1902년 일본인이 경영하는 경성학당에 입학해 일본어를 배웠다. 1904년 황실유학생으로 일본에 건너가 도쿄부립중학에 입학한다. 그런데 3개월 만에 공부를 포기하고 귀국한다. 2년 뒤인 1906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 고등사범부 지리역사학과에 입학한다. 이때 유학생 회보인 '대한흥학회보'를 편집한다. 1907년 '모의국회' 사건으로 퇴학당했고 이듬해 귀국한다.

그는 당시 도쿄의 가장 큰 인쇄소였던 수영사(秀英舍)의 활판인쇄기, 자모기, 제판시설, 식자시설을 들여온다. 최남선은 인쇄소를 드나들면서 인쇄기술을 배웠다. 1907년 서울에 신문관(新文館)이란 인쇄소 겸 출판사를 설립한다. 청계천변의 을지로2가 21번지 중소기업은행 본점 뒷골목 일대에 있던 건물로, 민간자본으로 설립된 최초의 출판사였다.

1908년 11월 1일 신문관에서 '소년'이 창간된다. 근대적 종합잡지의 효시다.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란 시가 그 창간호에 실린다. 이날은 우리나라 '잡지의 날'로 지정됐다. '소년'은 매달 2500부 정도를 발행했는데 거듭 매진사태를 빚었다. 신문 발행부수가 1000부이던 시절이었으니, 경이적인 부수에 경이적인 매진사태였다. 신문관은 이 잡지 이외에도 '청춘'과 어린이잡지 '붉은 저고리', '새별' 등을 냈다.

최남선은 '소년'을 창간한 이듬해 일본으로 가서 석달간 머물렀다. 이때 소설가 벽초 홍명희가 이광수를 소개해준다. 홍명희는 21세, 최남선은 19세, 이광수는 17세였다. 최남선은 이광수를 보자마자 '천재'임을 알아보았다. 그에게 잡지 '소년'에서 일해달라고 했다. 1910년 '소년'에 최남선의 편집장 레터가 실린다. 최남선 편집장은 잡지 발행에 참여할 이광수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다. "장래 우리나라 문단을 건설하고 증광(增廣)도 할뿐더러 다시 한 걸음 나아가 세계의 사조를 한번 갈아치울 포부를 가지고 바야흐로 경인충천(驚人衝天, 사람을 놀라게 하고 하늘을 찌름)의 준비를 하는 잠룡이오."

최남선의 잡지에 글을 쓴 류영모

이광수는 최남선을 만난 그날을 이렇게 말한다. "하루는 홍명희군이 오라고 하기에 가 보니 낯빛이 검은 청년을 소개하는데 그가 최남선이었다. 그는 와세다대학 예과를 버리고 문장보국(文章報國)을 목적으로 서울에 돌아와 '소년'이라는 잡지를 발행하기로 하였으니 나더러도 집필하라고 하였다. 최남선군은 나보다 2살 위였다. 형으로 경모하였다."('춘원전집')

류영모가 최남선을 알게 된 것은 '소년' 잡지 편집을 돕던 이광수가 어느 날 최남선과 함께 자신의 집에 찾아오면서였다. 함께 오산학교 교사를 3년 지낸 이광수는 류영모를 잘 알고 있었다. 1914년 7월 잡지 '청춘'을 창간할 무렵이었다.

류영모는 그 다음호인 8월호에 글을 싣는다. '청춘'에 처음 기고한 글은 '나의 1234'(1914년 8월 1일 청춘 2호)였다. 이후 꾸준히 글을 실었다. '활발(活潑)'(청춘 6호), '농우(農牛)'(청춘 7호), '오늘'(1918년 6월 청춘 14호), '무한대(無限大)'(청춘 15호) 등이다. '활발'이란 글은 당시 중학교 교과서인 '조선어독본(朝鮮語讀本)'에 전재되었다. '청춘'에 이어 나온 주간지 '동명(東明)'에 '남강 이승훈전'을 싣기도 했다.

28세 류영모의 '지금-여기-나' 철학

당시 실린 류영모의 글을 하나 읽어보자. '오늘'이란 글이다. 28세 때의 생각으로 믿기지 않는다. "지금 여기 나를 살아라"는 힘있는 충고다.

"나의 삶으로 산다는 궁극의 의미는 어디에 있는가. 가로대 오늘 살이에 있다 하노라. 오늘 여기 '나'라 하는 것은 동출이이명(同出而異名, 함께 났으나 이름이 다른 것)이라 하지 않으면 삼위일체(三位一體)라 할 것이니 '오늘'이라 할 때엔 여기 내가 있는 것은 물론이요, '여기'라 하는 곳이면 오늘 내가 사는 것이 분명하고 '나'라 하면 오늘 여기서 이렇게 사는 사람이라 하는 뜻이로다. 무수지점(無數地點)에 광겁시간(曠劫時間)에 억조인생(億兆人生)이 살더라도 삶의 실상은 오늘 여기 나에서 볼 뿐이다. 어제라 내일이라 하지만 어제란 오늘의 시호(諡號)요, 내일이란 오늘의 예명(豫名)일 뿐이다. 거기라 저기라 하지만 거기란 거기, 사람의 여기요. 저기란 저기 , 사람의 여기가 될 뿐이다. 산 사람은 다 나를 가졌고 사는 곳은 여기가 되고 살 때는 오늘이다. 오늘 오늘 산 오늘 오늘 어제의 나, 거기의 나는 죽은 나가 아니면 남된 나, 나 여기 사는 나를 낳아놓은 부모라고는 하겠으리. 현실아(現實我)는 아니니라. 내일을 생각하려거든 어떻게 하면 내일의 위함이 되도록 오늘을 진선(盡善)하게 삼가는 맘으로나 할 것이요. 너무 내일만 허망(虛望)하다가 오늘을 무료히 보내게 되면 이것은 나지도 않은 용마를 꿈꾸다가 집에 있는 망아지까지 먹이지 않는 격이라. 산 것은 사는 때에 살 것이니라."

류영모와 최남선은 닮은 점이 많다. 같은 해에 서울에서 태어났고 부친이 장사(제화재료상과 한약국)를 한 점도 같다. 둘 다 일어를 배우려 경성학당에 다녔고 도쿄에 유학을 갔다가 중도 귀국한 것도 비슷하다. 다만 류영모는 종교와 철학에 관심을 가졌고, 최남선은 문학과 역사에 열정이 많았다. 두 사람 스스로 상놈을 자처할 만큼 조선조 양반제도에 대해 반감이 컸다.

두 사람이 다른 길을 걷게 된 것은 일제의 압박에 무너진 최남선의 훼절 때문이다. 이광수는 최남선에 대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남의 티끌은 잘 보이는 법이다. "최남선은 자부심이 강하고 고집이 있다. 그러나 의지가 굳은 사람은 아니다. 그의 생활방향을 지배하는 것은 감정인 것 같다. 고집이 센 듯하면서 사람에게 넘어가는 일이 있는 것이 이 때문이다."(춘원전집)

감정주의와 유명함이 그를 훼절시켰다

노자(老子)는 "세상의 큰 일은 반드시 작은 일에서 지어진다"(天下大事 必作於細, <노자> 63장)고 하였다. 홍자성은 "속알(德)을 삼감에는 반드시 아주 작은 일을 삼가야 한다. 작은 일을 어설프게 하지 말아야 한다(謹德須謹於 至微之事 小處不滲漏)"고 하였다(홍자성, 채근담). 최남선은 작은 일에 조심할 줄을 몰랐다. 나라를 위하여 문화사업을 하는 그에게는 돈이 많이 필요하였다. 일제(日帝)가 최남선을 훼절시키는 것은 오히려 쉬웠을지 모른다.

최남선은 유명했다. '해에게서 소년에게'는 한국 최초의 근체시이고, '단군론'은 최초의 단군신화 연구이다. 민족의 독립선언서를 기초했다. 민족정기를 살린 올바른 논지와 힘찬 문장은 이 겨레를 크게 움직였다. 그러나 이런 이름들이 그를 반드시 넘어뜨려야 할 표적이 되게 했다. 그는 압박과 회유에 약했고 모든 공을 허사로 만드는 선택을 하고 말았다.

류영모는 하느님에게 나아가는 원대한 뜻을 지녔으나 땅에서의 몸가짐은 지극히 조심하였다. 도덕적인 실수나 실족을 스스로 용납하지 않았다. 최남선에 비교하여 무명이었기에 일제의 표적이 되지도 않았다.

광복된 뒤에 최남선은 친일 시비로 겨레 앞에 떳떳이 나설 수 없었다. 그리하여 최남선은 괴롭고 외로운 세월을 보내야 했다. 류영모는 현동완(玄東完·1899~1963·사회운동가)과 함께 최남선을 찾았으며, 6·25전쟁 뒤에도 난지도에 있는 현동완의 거처에서 최남선과 함께 묵으면서 그간 뜸해졌던 대화를 나누기도 하였다. 최남선이 앓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류영모는 문병을 갔다. 류영모 자신이 죽기로 날 받은 해에 최남선이 먼저 세상을 떠났다. 류영모는 성당에서 거행된 장례식에 참석하였다. 그리고 추모의 글을 썼다.

아 언니의 이 누리에 부린 지고 지련 무거운 짐
아 언니의 보인 걸음 예고 예련 멀직 얼 길
이 날로 웃(하느님) 하이심(使命) 한참 그치시닛가

(아 동지가 이 땅에 내린, 지고졌던 무거운 짐
아 동지가 보여준 걸음, 가고 갔던 머나먼 정신의 길
오늘부터 하늘의 사명을 한동안 그치십니까)

          다석 류영모의 최남선 추모글 '육당에 떨어진 쓰림' 중에서

최남선이 '신음소리'라면 나는 '곡소리'

류영모는 홍일식(洪一植·1936~·전 고려대 총장)이 지은 '육당연구'를 읽었다. 홍일식이 육당의 시조는 병자의 신음과 같다고 평하였다. 류영모는 말하기를 "시대는 병환 깊은 시대요. 육당(六堂)은 선명(善鳴)이다. 물론 병자의 신음이었어야겠지. 신음이 무요(無要)하면 시조는 무용(無用)이리. 각설코 육당이 병자 신음만 하였다면 다석(多夕)은 망자(亡者)의 귀곡(鬼哭) 같다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六堂 時調(육당시조) 신음설

六堂病者呻吟音 多夕亡者鬼哭陰(육당병자신음음 다석망자귀곡음)
若到無用時調日 可能不要聞呻吟(약도무용시조일 가능불요문신음)

육당의 시가 앓는 이의 앓는 소리라면
다석의 시는 땅 속 귀신의 울음소리라
만일에 시조가 쓸데없는 날에 이르면
앓는 소리는 들을 필요가 없으리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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