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대장동 특혜·로비 의혹 재판에서 ‘정영학 녹음파일’이 재생됐지만 그 음질은 매우 좋지 않았다. 공판을 방청하는 사람들은 녹음파일 내용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조악한 음질을 조정 없이 원본대로 틀 수밖에 없는 이유는 있다. 녹음파일 증거능력 훼손 우려 때문이다. 다만 재판부 결정으로 검찰이 음질 개선을 요청할 수 있다는 대안은 남아 있다.
10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2부(이준철 부장판사)는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배임) 등 혐의를 받는 유동규 전 성남도시개발공사(성남도개공) 본부장, 화천대유자산관리(화천대유) 대주주 김만배씨, 남욱 변호사, 정민용 변호사, 정영학 회계사 공판기일을 열고 정 회계사 녹음파일 증거조사를 진행했다. 지난달 29일에는 정 회계사에 대한 증인신문이 이뤄졌고 이달 2일부터는 녹음파일 법정 재생이 시작됐다.
문제는 녹음파일 음질이었다. ‘저음질 재생’으로 녹취록 내용이 세간에 오인될 우려가 있어서다. 지난 6일 진행된 정 회계사 녹음파일 증거조사에서는 김씨가 지난 2020년 3월 24일 이른바 ‘50억 클럽’에 포함됐다고 알려진 인물들에게 대장동 사업 수익을 얼마나 배분할지 거론한 정황이 공개됐다. 녹음파일에서 김씨는 금품을 나눠줄 사람들의 이름을 일일이 호명했다.
녹취록 증거조사 핵심 쟁점 가운데 하나는 녹취록에 담긴 유 전 본부장, 김씨, 남 변호사, 정 회계사 등의 대장동 사업 관련 전방위 로비 정황이었다. 그만큼 김씨가 열거하는 인사들의 목록은 이날 녹음파일 법정 재생에서 중요한 대목이었다.
그러나 음질 상태가 좋지 않아 방청석에 있는 사람들은 그 명단에 누가 속했는지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 실제 이 과정에서 한 법조인이 김씨가 호명한 인사에 속한 것으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 이 사건과 무관한 사람이 자칫 이에 연루된 것으로 오해를 받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이 사건 재판부와 검찰, 변호인단, 피고인 등은 정 회계사 녹취록을 문서로 푼 녹취서를 출력물이나 노트북 화면에 띄운 파일을 보며 녹음파일 내용과 대조하는 식으로 정 회계사 녹취록 증거조사를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녹취서 없이 공판을 보는 언론과 방청객 등은 녹취록이 무슨 내용인지 정확히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런 정황을 감안하고서라도 저음질 녹음파일을 원본 재생할 수밖에 없는 사정은 있다. 녹음파일 증거 자격이 훼손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통상 녹음파일 증거조사에서 가장 우선시되는 쟁점은 △녹음파일이 원본 그대로인지 여부 △녹음파일 불법 조작 가능성 여부 등을 가리는 것이다.
이에 대해 부장검사 출신 윤재필 법무법인 제이앤피 대표변호사는 “법정에서 녹음파일 증거조사를 진행하는 경우 녹음파일을 원본 그대로 재생하는 게 원칙”이라며 “녹음파일 조작 여부 등 불법 요소가 개입돼 있는지 확인하는 게 첫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절차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법정에서 재생되는 녹음파일 음질 개선을 아예 못하는 건 아니다. 녹음파일과 녹취서 간 ‘동일성’이 인정되는지 명확히 확인할 수 없으면 재판장 결정에 따라 검사는 대검찰청에 음질 개선 작업을 요청할 수 있다.
이에 재판부와 검찰, 변호인단과 피고인 등만 녹취록 내용을 파악할 게 아니라 공개재판을 기본원칙으로 하는 공판중심주의 강화 차원에서 녹취록 음질 개선에 신경써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 1월부터 시행된 ‘검찰 피신조서 증거능력 제한’으로 언론과 방청객 등 재판 간접 참여자들의 검증이 더욱 중요해졌다는 것이다.
부장판사를 지낸 여상원 법무법인 로고스 변호사는 “법정에서 재생되는 녹음파일 음질이 좋지 않아도 해당 녹음파일의 증거 자격이 충분히 증명됐다면 증거로서 사용할 수 있다”면서도 “공개재판 원칙과 국민의 알 권리 충족이라는 측면에서는 문제시 될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