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 수교 30주년 인사이트] "세계화는 끊임없이 편곡되는 '불후의 명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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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한진 중국경제관측연구소장
입력 2022-09-07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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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타이타닉(1997)'은 세계를 강타한 초대형 흥행작이다. 박스오피스는 물론 OST와 캐릭터도 시장을 휩쓸었다.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땐 재난과 슬픈 사랑 이야기였다.
 
한·중 수교 20주년(2012)이 지나면서, 묘하게 한·중 관계에 연결됐다.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별 그대)'가 중국과 일본에서 인기를 끌 때였다. 왕치산(王岐山) 국가부주석(당시 중앙기율검사위 서기)이 '별 그대'를 언급한 것으로 알려져 언론과 여론의 관심이 뜨거웠다.

그 무렵 나는 일본 국책 연구소인 아지켄(아시아경제연구소, IDE-JETRO)에 객원 연구원으로 가 있었는데(2014), 일본의 중국 전문가에게 들은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중국 지도자들에겐 좋아하는 외화가 한두 편 이상 있다.", "시진핑 국가 주석은 2012년 미국을 방문해 오래전에 본 '대부(The Godfather)'를 회고했단다.", "리커창 총리와 후진타오 전 주석은 각각 인도 영화 '세 얼간이'와 한국 드라마 '대장금'을 즐겼다." 등.

장쩌민 전 주석은 '타이타닉'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고, 우리 국회 격인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대표들에게 관람을 권했다고 한다. 빈자와 부자의 관계, 그리고 서로 다른 계층이 위기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잘 표현해냈다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그때 중국은 한창 '세계 학습' 중이었다.

수교 30주년이 된 올해, 타이타닉은 1900년대 초의 세계화를 떠올린다. 영화(1912)와 지금(2022)의 시대적 배경이 대비된다. 젊은 화가 잭(리어나도 디캐프리오)은 도박에서 딴 티켓으로 영국발 뉴욕행 초호화 유람선에 오른다. 북대서양을 가로질러 항해하는데 영화 속 어디에도 까다로운 출국 수속 장면이 나오지 않는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실제 상황이 그랬다. 제1차 세계대전(1914~1918) 이전, 국경 간 왕래가 자유롭던 '세계화 1.0' 시대였다.

1929년 뉴욕증시의 주가 대폭락으로 시작돼 자본주의 국가 전체에 파급된 세계 대공황이 터졌다. 미국은 네명 중 한명꼴로 실업자가 되자 보호무역주의 정책으로 돌아섰다. 2만여 개 품목의 수입 관세율을 평균 59%, 최고 400%까지 올리자(스무트 홀리 관세법, 1930), 고관세율은 세계적인 흐름이 됐다. 교류하고 왕래하는 세계화 흐름이 정지됐고, 이것이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의 한 원인이 됐다는 평가다. 독일과 일본은 경제적인 수단으로 해외 자원과 시장을 확보할 수 없어 무력을 동원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자유무역은 세계 평화의 조건이다. 물론 자유무역을 하지 않으면 바로 세계대전으로 가는 것은 아니지만 자유무역이 전쟁 발생 가능성을 낮춰 주는 것은 분명하다.

전후 새로운 세계 경제 질서를 만들기 위해 연합국 44개국이 모인 '브레튼우즈 회의(1944)'는 이후 자유로운 세계 무역의 기초가 됐다.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GATT)', '국제통화기금(IMF)', '세계무역기구(WTO)', 다자간 자유무역협정의 원류적 배경이다. 맥킨지(McKinsey)와 마이클 포터 하버드대 교수는 글로벌 가치사슬(GVC) 모델을 정립했다. 그 연장선에 중국의 급속한 경제 성장과 '중국이 만들고 아마존이 판다.(Made in China, Sold on Amazon)'로 상징되는 미·중 경제 커플링(동조화), 한·중 경제교류 성과가 연결됐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는 미국과 중국의 경제적 '동거'를 도마 위에 올렸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2008)인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는 종내 미·중 협력 모델을 '위험한 동거'라는 표현으로 꼬집기도 했다. 10년 뒤인 2018년은 모든 흐름을 바꾸는 분수령이 됐다. 다국적 경영과 다자간 무역 시스템을 표방하던 미국이 달라졌다. 자국 보호를 위해 산업정책으로 선회하며 대중국 견제·압박 수위를 높여 갔다. 가공무역과 수출, 산업정책 위주였던 중국은 양자에서 다자 무대에 이르기까지 대외 통상정책을 강화했다.

다시 4년이 지났다. 글로벌 가치사슬이 구조적으로 변하고 있다. 원재료와 노동력, 자본 등 자원을 결합하는 분업 시스템의 무대가 북미, 유럽, 아시아 등 대륙 단위로 재편되는 조짐을 보인다. 자국 산업과 기술 보호, 지정학적 리스크 관리 차원의 경제안보가 새로운 과제로 떠올랐다.

지난 5월 세계경제포럼(다보스 포럼)에 참석한 조제 마누엘 바호주 골드만삭스 인터내셔널 회장은 "미·중 간 긴장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디커플링 우려를 야기하고 있다"며 "온쇼어링(해외 기업 유치, 자국 기업 국내 아웃소싱 확대)과 지역화가 기업의 최신 경향이 돼 세계화 속도를 늦추고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공급망 병목 현상과 감염병 유행, 각국의 수출·수입 규제는 보호무역주의적 경향을 더욱 강화하며 동맹국·우호국(프렌드쇼어링), 인근국(니어쇼어링) 중심의 공급망 재편도 현실화하고 있다.
 

중국진출 기업의 전략적 포지셔닝 [자료=KOTRA 중국경제관측연구소]

대(對)중국 경제교류 협력이 빈번한 우리 기업들은 해외 비즈니스의 전략적 포지셔닝을 잘 점검할 필요가 있다. 원자재 조달과 제품 판매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을 각각 가로축과 세로축으로 해서 입지와 목표시장을 결정할 수 있겠다(그래픽 참조).

원자재 조달과 판매 모두 중국 비중이 크다면 중국 내 연해 지역과 내륙 지역에 분산 배치하는 것을 고려해볼 수 있다(제1사분면). 중국 내 원자재 조달 비중은 작지만, 중국 내 판매 비중이 큰 경우라면 중국 연해 거점지역 입지가 유리하다.(제2사분면). 원자재 조달과 판매 모두 중국 비중이 작은 기업엔 제3국 단독 혹은 공동 진출이나 국내 복귀가 좋다(제3사분면). 마지막으로 중국 내 원자재 조달 비중은 크지만, 중국 내 판매 비중이 작고 대신 제3국 수출형 기업이라면 중국 내 해당 산업·업종의 중심 지역에서 생산하는 것이 원칙적으로 바람직하다(제4사분면).

놓쳐선 안 될 두 가지 흐름이 있다. 그 하나는 세계화는 사라지지 않고 재편되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에는 "끊으려야 끊을 수 없고, 정리할수록 더 헝클어진다(剪不斷 理還亂)"라는 말이 있다. 중화권의 전설적인 가수 덩리쥔(鄧麗君)의 노래로도 널리 알려진 이 말은 남당(南唐)의 황제 이욱(李煜)이 지은 사(詞)에 나온다. 마치 글로벌 가치사슬의 재편을 표현한 듯하다. 세계화는 철 지난 유행가라기보다는 끊임없이 편곡되는 불후의 명곡에 가깝지 않을까? 국제 분업구조와 한·중 경제협력 패러다임도 그에 따라 새롭게 전환할 것이다.

다른 하나는 중국 내 정책과 시장 풍향을 잘 보는 것이다. 다섯 가지 영역이 있다. 첫째 정책에 따라 시장이 비교적 크게 움직이는 정책시(政策市)의 특성이 심화할 것이다. 대내 정책은 사회적·경제적 안정과 ESG, 방역을 핵심으로 하고 대외정책은 양자 관계보다는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 등 다자 관계에 무게 중심을 둘 것으로 보인다. 둘째 거시정책 주기의 디커플링(비동조화) 추세다. 미국과의 경제 관계 변화는 무역과 투자 영역보다는 거시경제 추세와 정책 대응 측면에서 달라질 것이다. 셋째는 인구 문제다. 인구 정점이 예상보다 빨리 다가오고 있어 빠르면 올해 총인구가 감소할 수 있다는 관측도 있다. 인구 변화는 시장 구조를 새롭게 재편할 것이다.

넷째 미·중 관계는 당장 위기 발생 가능성은 크지 않지만 상호 공방 국면이 장기간 지속될 것이다. 다섯째 코로나 팬데믹 이후의 내수시장 유망 분야를 세심하게 관찰해야 한다. 젊은 층인 Z세대는 이미 시장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들은 가성비보다 만족감을 추구하며, 이를 위해 고가 구매를 마다하지 않는다. 디자인과 사회적 유대감, 즉석식품을 선호하는 것도 특징적 현상이다.

“100일 관리에 소홀하면 미래 100년도 없다”고 현대 경영학의 창시자로 통하는 피터 드러커가 말했다. 눈앞에만 몰두하면 미래 발전을 기약할 수 없다. 멀리만 내다본다면 당장 생존이 흔들린다. 기업의 단기 대응과 장기 전략이 균형을 이루어야 하는 이유다.
 

박한진 KOTRA 중국경제관측연구소장

필자 주요 이력

▷현 중국경제관측연구소장 ▷현 한국외대 중국외교통상학부 객원교수 ▷전 코트라 중국지역본부장 ▷전 한중사회과학학회 부회장 ▷중국 푸단대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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