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에는 여러 층위가 있다. 군사정권 시절에는 정치 민주화, 그중에서도 민주적 제도 마련이 화두였다. 대통령 직선제 등 정치 제도 기틀이 닦인 뒤에는 부의 불평등 조정을 기치로 내건 경제 민주화 바람이 불었다. 나랏밥 먹는 사람을 시민 손으로 뽑는 구조가 자리 잡았다고 해서 정치적 민주주의는 완성된 걸까. "그렇지 않다"는 게 지배적 평가다.
한국 정치가 이런 세평을 듣는 결정적 지점 가운데 하나는 공천이다. 공천은 당 지도부를 중심으로 하는 충성 경쟁과 계파 싸움의 장으로 빛바랬다. 정당이 선거에 출마할 후보를 추천하는 과정에서 지배적으로 작용하는 요소는 쉽게 말해 '윗분들 마음'이라는 얘기다. 공천이 특정 개인 또는 집단에 사유화되는 사이 정당 내에서 여러 의견을 표출하고 토론할 생산적 공간도 사라졌다. 이견은 곧 공천 탈락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현행 공천은 설익은 정당 민주주의 민낯을 드러내는 상징과 같다는 의미다. 공천을 향한 정치권 안팎 비판과 자성은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이제라도 공천의 비민주성을 거둬내고 공직에 적합한 인물을 가려내는 본연의 역할을 살려야 한다는 주문이 나온다. 공천 민주화가 돼야 대의 민주주의를 채택한 한국에서 국회가 민의를 대표하는 제 기능을 할 수 있다는 당부 섞인 목소리다.
이현출 건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당장 정당을 구성하는 당원들 의사와도 동떨어진 공천 결과가 나오는 건 공천이 소수 지도부에 장악됐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박상병 정치평론가는 "공천에서 계파 정치가 작동하면서 유능한 인물보다 계파에 충성하는 사람에 출마 자격이 부여되고 있다"고 말했다.
공천권 전횡은 정치 후퇴로 이어지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시민에게 돌아간다. 이준한 인천대 정치외교학 교수는 "차기 당권주자와 다른 사람을 지지하거나 그와 반대되는 정책을 주장하면 공천을 못 받을 가능성이 커진다"며 "당의 자율적 의사결정이 사라지고 특정인을 중심으로 당이 운영될 소지는 커지는 반면, 정책 논의와 경쟁은 자취를 감추게 된다"고 전했다.
◆"권력 창출 수단으로 전락...독립성·중립성 담보 제도 정착해야"
공천을 둘러싼 악습이 지속하는 이유는 '정당의 의지 부족'이라고 전문가들은 일축한다. 공천권은 당 내외에서 권력 기반을 다지고 권력을 또다시 확보하는 수단으로 동원돼 왔다고 이들은 판단하고 있다.
정치권이 이런 권력 순환 구조를 와해하기보다는 선점하는 전략을 우선시해와 그간 공천 개혁은 말만 무성한 채 공염불이 돼왔다는 뜻이다. 이준한 교수는 "공천권을 강력히 행사할수록 자기편을 규합해 당권이나 대권에 더 가까워지고, 이를 바탕으로 권력을 재창출할 수 있다는 판단이 깔려 있다"고 분석했다.
결국 당 지도부의 불합리한 입김을 최소화할 공천 제도 시행이 시급하다는 게 전문가들 진단이다. 이들은 '옥석 가리기'라는 공천 기능을 되살리도록 지원자에 방점을 찍는 '인물 중심 공천'으로 제도를 개선하고 이를 상시적으로 정착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박상병 평론가는 "핵심은 '누가 뽑을 것인가'가 아닌 '누구를 뽑을 것인가'라는 문제로 전환하는 일"이라며 "당 안에서 중립성을 담보받는 '인재위원회'를 제도화하고 각 정당의 정책, 강령과 지원자의 자질, 전문성, 도덕성 등을 놓고 평가해 후보를 발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현출 교수는 "'국회가 어떤 사람들로 채워졌으면 좋겠다'와 같은 공천에 대한 원초적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라며 "지원자가 어떤 정책적 안목과 비전을 지녔는지 분석하는 매커니즘을 마련하고 이를 독립적으로 이행할 외부 인사로 구성된 '배심원 제도' 등을 적용해 볼 만 하다"고 설명했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