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뷔 30년이 되었지만, 아직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시대극을 해 본 적 없어요. 이해영 감독이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많은 영화가 있지만 '결이 다르게 만들어보고 싶다'라고 했고, 그 말에 관심이 갔어요."
영화 '유령'(감독 이해영)은 1933년 경성, 조선총독부에 항일조직이 심어놓은 스파이 '유령'과 용의자로 지목된 이들이 의심을 뚫고 외딴 호텔을 탈출하기 위해 벌이는 사투를 담고 있다.
극 중 설경구는 경무국 소속 총독부 통신과 감독관, '무라야마 쥰지'를 연기했다. 명문 무라야마 가문의 7대로 조선말과 사정에 능통해 성공 가도를 달려왔다. 그러나 일말의 사고 이후 좌천되어 통신과 감독관으로 파견된 인물. '유령'을 찾으려는 덫에 걸린 후, 자신도 용의자임에도 군인 시절 경쟁자였던 '카이토'(박해수 분)보다 먼저 '유령'을 찾아 화려하게 경무국으로 복귀하고자 한다.
설경구는 '쥰지' 캐릭터에 관해 "기능적인 역할"이라고 소개했다. '쥰지'는 맡은 임무가 있고 그걸 해내는 게 배우의 몫이었다는 설명이다.
"제가 생각하는 '쥰지'의 기능적 역할은 극의 혼선을 주는 거로 생각했습니다. 관객들의 의심을 더욱 키우는 것. 그게 제 목표였죠. 알 듯 모를 듯한 표정이나 뉘앙스를 주는 데 집중했어요. 정확하게 짚어내기보다 혼란스럽게 만들어내는 게 중요했어요. 영화적으로, 기능적으로 접근하려고 했고요."
그는 '쥰지' 캐릭터를 구성하며 그가 가진 콤플렉스에 주목했다. 한국인인 어머니를 무시하고 외면하며 자신에게 한국인의 피가 흐른다는 것에 분노하는 '쥰지'의 콤플렉스를 기반으로 캐릭터를 하나하나 쌓아나간 것이다.
"저는 '쥰지'의 잔혹한 대사들이 자신의 콤플렉스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했어요. 죽음을 앞둔 상황마저도 '너희는 진다'라고 우기는 그 모습이 콤플렉스 자체처럼 보였고요. '쥰지'의 속에 뭐가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그가 자신의 콤플렉스를 지우려고 노력하는 모습에 초점을 맞추었어요."
'쥰지'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충실하게 캐릭터를 구성했지만, 일부러 전사를 만들거나 서사를 상상하지는 않았다. 오롯이 시나리오에 집중하려고 한 것이다.
"('쥰지'의 전사를) '굳이 만들어야 할까?' 하고 생각했어요. 머리로는 상상할 수 있겠지만 그 역할이 깊고 무거워지면 (기능적 역할을) 소화하기 힘들 거로 생각했거든요."
설경구는 치열한 액션 장면을 여러 차례 소화했다. 그는 '유령' 속 액션에 관해 "살기 위해 벌이는 싸움"이라고 설명했다. 멋들어진 액션보다는 살기 위해 처절하고 치열해 보여야 했다고 거들었다.
"극 중 등장하는 모든 액션은 살기 위해 벌이는 액션이라서 처절해 보여야 했어요. '차경' 역을 맡은 이하늬 씨와 동등하게 치고받아야 하는데 저도 모르게 선입견이 있었는지 조심스럽더라고요. 여자 배우다 보니 혹시라도 세게 치거나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고요. 그런데 며칠 (액션 장면을) 찍어보고 깨달았어요. '아, 안 그래도 되는구나!' 이하늬 씨가 잘 받아주었기 때문에 저도 마음 놓고 액션에 임할 수 있었어요."
영화 '유령'에는 다양한 성격의 여성 캐릭터가 등장하고 이들이 마음껏 날뛰며 액션을 펼칠 수 있는 '판'을 깔아놓았다. 많은 여자 배우가, 관객들이 기다려왔던 순간이었다. 이를 지켜보는 남자 배우의 마음은 어땠을까? 설경구는 "반갑고 통쾌했다"라고 말했다.
"마지막 장면에서 여자 캐릭터들이 총을 난사하는 모습은 정말이지 통쾌하더라고요. 여성 액션 영화라……. 더 생겨야 하지 않나요? '브로맨스'만 너무 많지 않나? 의도한 건 아니지만 최근 작품들이 여성 액션 영화들이 많네요. 넷플릭스 '길복순'도 그렇고요.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해요. 더 나와도 되고, 더 강렬해도 좋아요. 여성 캐릭터가 등장하는 순간 거칠기도 하지만 섬세함도 가지고 있거든요. 다양한 재미를 주는 거 같아요."
그는 여자 배우들의 활약에 대해서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주연 배우였던 이하늬, 박소담부터 특별출연에 가까웠던 이솜, 이주영에 관해서도 언급하며 그들의 활약상에 감탄하기도 했다.
"이하늬 씨와 박소담 씨가 굉장히 (영화를) 잘 이끌어주었어요. 주연 배우로서 부담을 느꼈을 텐데도 굉장히 밝고 에너지틱하게 활약했. 개인적으로는 이솜 이주영 씨가 인상 깊었어요. 이 영화를 두고 '이하늬가 열고, 박소담이 닫았다'고 표현하시는데 저는 '이솜이 열고, 이주영이 닫았다'라고 말하고 싶어요. 당연히 하늬 씨, 소담 씨가 잘해주었고 깊은 인상을 남겼지만 저는 이솜 씨, 이주영 씨가 오래도록 생각나더라고요."
통신과 암호 해독 담당 '천은호 계장'을 연기한 서현우와, 신임 총독의 경호대장 '다카하라 카이토' 역의 박해수에 관해서도 언급했다. 서현우, 박해수와는 전작에서 깊은 인연을 맺었다며 두 배우에 대한 남다른 의미를 전하기도 했다.
"저는 서현우 씨와 처음 만났다고 생각했는데, 현우 씨가 '소원'에 출연했다고 하더라고요. 당시 구급 대원으로 출연했었다고요. 얼굴은 잘 기억나지 않았는데 당시 그 상황이나 모습이 기억이 나더라고요. 이렇게 시간이 흘러 '서현우'라는 이름으로 다시 만나게 되니 정말 반가웠어요. 그동안 열심히 연기해주었고 이렇게 다시 같은 작품에서 만나게 되다니. 기쁘기도 했죠."
"박해수 씨는 말할 것도 없이 최고예요. 그 역할은 사실 일본인 배우가 맡으려고 세팅이 되어있었던 캐릭터거든요. 그런데 코로나19 때문에 한국에 들어올 수 없게 되어서 촬영 2주 전에 급하게 합류했어요. 출연을 결정한 순간부터 일본어 선생님과 합숙했다고 하더라고요. 첫 촬영을 마치고 배우들을 포함해서 제작진 모두 박수를 쳐주었어요. 우리도 모르게 박수가 나오더라고요. 정말 대단했죠."
연기 경력 30년. 그는 한때 매너리즘에 빠져있을 때가 있었다고 고백했다. 매 순간 작품에 몰입하고, 최선을 다해왔지만, 어느 순간 반복적인 패턴에 기계적으로 작품을 대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매너리즘이라고 해야 할까요? 한 작품이 끝나면 또 다른 작품을 하고, 또 하고……. 계속 영화를 기계적으로 찍고 있더라고요. 어느 날 '이러다가는 추락하겠다'라고 생각했어요. 아직 추락하기엔 젊은데, 어쩌지? 그러다가 '불한당'을 찍으며 구제받게 되었어요. 현장에 있는 자체가 소중하게 느껴지더라고요. '자산어보'를 찍을 당시 일찍 섬으로 출근해 이정은 씨와 이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어요. '지금 이렇게 바다를 보는 게 행복하지 않냐'고요. 아주 절실하게 영화에, 연기에 임하고 싶지는 않아요. 너무 절실하면 오히려 망쳐버릴 거 같거든요. 도를 넘을 거 같고요. 그저 현장에서 숨 쉬는 일에 감사한 마음으로 임하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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