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당대표가 되든 국민의힘 새 지도부의 최우선 과제는 내년 4월 총선에서의 승리일 것이다. 총선에서 이겨서 지금의 여소야대 체제를 바꾸지 않고서는 실질적으로 할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이다. 전 정권에서 임명된 공공기관장 하나 교체할 수 없는 상태가 계속된다면 새 정부의 철학과 정책을 어떻게 구현할 수 있을까. 남은 임기 내내 야당과 티격태격만 하다가 끝날 수도 있다. 그로 인한 갈등의 심화와 국정 운영의 난맥상과 비효율은 여야(與野) 차원을 떠나 국가적으로 큰 손실이 터이다.
보수 우파의 대표적 정치평론가인 고성국 박사(고성국TV 대표)는 지난달 25일 대구에서 열린 ‘동서미래포럼’ 창립식에서 윤석열 정부의 성공조건으로 공천혁명과 정치쇄신을 들었다. “4월 총선을 계기로 젊고 참신하고 유능한 정치신인을 발굴해 대대적인 공천혁명을 주도해야 한다”는 것이다.(동서미래포럼은 지난 대선 때 영호남 화합운동을 벌였던 인사들이 선거 후 확대·재결성한 모임이다. 고 박사는 특별 연사로 초대됐다.)
내년 4월 총선에 尹 정권 성패 달려
그는 “모두들 ‘윤 정부의 성공을 위해 한 몸을 바치겠다’고 하는데 4월 총선에서 지면 무슨 수로 대통령을 도울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했다. “국민의힘과 자유 시민사회단체 및 지식인 그룹 간에 정치개혁 연대를 꾸려서 공천혁명 담론의 선점과 전파를 주도하라”고 했다. 이를 위해서 국민 체감도가 높은 국회의원 특권 전면 폐지를 주장하기도 했다.
공천혁명은 선거 때마다 나오는 얘기지만 이번엔 더 절박하게 다가온다. 나라 안팎으로 사정이 어려운 데다가 정치개혁에 대한 국민의 욕구도 그만큼 커진 탓이다. 공천혁명은 정치의 한 축을 바로 세우는 작업이다. 정치의 요체가 ‘가치의 권위적 배분’을 넘어, 한 시점에, 한 사회에 주어진 문제들을 얼마나 잘 해결할 수 있느냐 하는 능력(적실성)의 문제로 진화한 지 오래지만 요즘 이를 더 절감하게 된다. 공천은 그 첫 단추를 끼우는 작업이다. 민주당도 마찬가지다. 좋은 정치는 좋은 공천에서 시작된다. 실패로부터 배운다고 몇 가지 사례를 보자.
21대 총선 참패의 교훈
보수 우파 정당으로서 국민의힘이 공천에서 실패했다고 평가되는 대표적인 총선이 2020년 21대 총선과 2016년 20대 총선이다. 21대 총선에서 국민의힘의 전신인 미래통합당은 득표율 41%로 지역구에서 84석을 얻었다.(비례위성정당인 미래한국당의 19석을 합치면 103석. 총 의석수는 300석) 상대인 더불어민주당은 49%로 163석을 차지했다. 충격적인 참패였다. 특히 수도권에선 전체 의석 121석 중 103석을 민주당에 내줬다.
그 패배의 결과로 만들어진 강고한 여대야소 정국 속에서 문재인 정권은 유화(宥和) 일변도의 대북정책, 소득주도 성장, ‘검수완박’ 등을 밀어붙였다. 지난 대선에서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가 승리함으로써 뒤늦게 제동이 걸리긴 했지만 견제받지 않은 권력이라는 말을 들었다.
당시 공천관리위원장(2020년 1월 17일∽3월 13일)이었던 김형오 전 국회의장은 2021년 3월 <총선 참패와 생각나는 사람들>이란 제목의 책을 냈다. ‘공천고백기’란 부제(副題)가 말해주듯이 공천관리를 책임졌던 사람이 쓴 일종의 참회록이다. 저자가 “나 하나 불쏘시개 되어도 좋다는 마음으로 썼다”고 했듯이 웬만한 용기와 애당심 없이는 쓸 수 없는 책이다. 이런 고백록이 나온 것 자체가 우리 정치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다. 그는 ‘참회록’이라고 했지만 나에게는 ‘과거의 잘못을 다스려 앞으로 닥칠 우환을 경계한다’는 징비록(懲毖錄)으로 읽혔다. 정치에 관심이 있는 사람, 특히 보수 우파에겐 가히 필독서다.
좋은 공천, 좋은 정치
그의 패인분석과 대안 제시는 실증적이고 구체적이다. 책에 따르면 당시 공천관리위는 이른바 ‘혁신공천’의 3대 원칙, 곧 △과감한 물갈이(인적쇄신) △구태 청산(계파별 나눠먹기 배제) △청년과 여성 신인 적극 충원을 내걸고 최선을 다했다고 한다. 그 결과로 역대 총선에서 보기 힘든 ‘보수통합’을 일궈냈지만, 이게 표로 연결되지 않았다고 했다. 국민에게 ‘보수가 통합됐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데는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의 소회다.
“··· 거기에다가 선거의 승패를 가르는 중도층도 끌어오지 못했다. 안정을 희구하면서도 변화에 대한 수용이 강한 중도층을 의식해 변화의 고삐를 끝까지 잡고 갔어야 하나 그러지 못했다. 고삐를 쥐고 전국을 누빌 유력인물(리더)도 없었다. ··· 역대 총선에선 대개 변화의 폭을 크게 움직인 쪽이 승리했다. 17대 탄핵풍의 진원지인 열린우리당, 18대 뉴타운 바람의 한나라당, 19대 경제민주화를 내걸고 변신한 변화의 새누리당 등이 그런 경우였다. ··· 이러는 사이에 코로나(재난) 지원금이 뿌려졌다. 전대미문의 역병 앞에서 민주당은 안정과 신뢰의 탑을 쌓아갔고 우리는 하나씩 무너져갔다. ···”
저자는 대안으로 ‘시스템 공천’을 제안한다. 의정활동이 공천에 직결되어야 하고, 지역관리를 잘하면 공천을 보장해주고, ‘포청천 윤리위’를 상설해 공천도 사전 검증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공천관리위는 선거 5개월 전에 구성하고, 공천관리위원회의 독립성도 보장되어야 한다고 했다. 공천자 40%는 매년 의정활동 평가와 당무감사를 통해 미리 정해놓고, 나머지 60%는 공천관리위에서 심사해 확정하는 방안도 제시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충분한 시간을 갖고 공천 작업을 심도 있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민주당에도 참고가 될 듯싶다.
공천파동 나면 공약은 묻힌다
2016년 제20대 총선을 앞두고 당시 새누리당(국민의 힘)은 들떠 있었다. 야권의 분열로 180석 이상을 얻을 거라는 전망들이 돌았다. 김무성 대표부터 그런 예상을 했다. 결과는 지역구 105석에 비례대표 17석 등 122석에 그쳤다. 123석을 얻은 민주당에 제1당을 내준 참패였다. 오만한 행태와 공천파동이 원인으로 지목됐다. 당시의 진박 논쟁과 김무성 대표의 ‘옥새파동’은 지금도 조롱거리다. 이때도 총선백서가 나왔다. 참회록이라기보다는 유권자들과 일문일답하는 형식으로 정리된 백서였다. 그래서 이름도 <국민백서>.
국민이 물었다. 참패의 원인이 뭔가? 당이 답했다. “지지층의 외면을 자초한 공천파동이 가장 큰 원인이다. 지지층에게 지지할 근거를 주기보다는 지지를 철회할 근거를 주었다. ··· 계파 간 극한 대립 상황에서 리더십도 실종됐다. 여권 내 권력 획득과 방어에만 집중하다 보니 공당의 이미지를 상실했다.” 공천에 대한 평가를 구했더니 이런 답이 올라왔다. “민주당보다 못한 느낌이었다. 신선한 인재는 찾아볼 수 없고 구태의연한 현역 중심의 공천, 친박 중심의 공천이 식상했다.” 당도 이를 시인했다. “공천 파동과 집권 여당으로서 책임감 있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가장 중요한 원인이다. 밥그릇을 놓고 싸우면서도 계속 지지를 받을 수 있으리라는 착각과 오만이 지지층까지 외면하게 만들었다. ···”
야당에도 타산지석
<국민백서>는 이 대목을 ‘공천파동의 쓰나미, 모든 것을 집어삼키다’라는 제목으로 이렇게 정리했다. “계파 갈등의 조짐은 공천관리위원회(공관위) 구성에서부터 시작됐다. ··· (계파 갈등으로) 얼렁뚱땅 구성된 공관위는 이한구 공관위원장을 비롯해 친박 중심으로 이뤄졌다. 공관위원들의 자질도 대내외적으로 도마에 올랐다. ··· 공천이 계속 지연되면서 당내 모든 조직과 대응능력이 마비되고, 본격적으로 선거준비에 돌입해서도 각각의 과정들이 유기적으로 진행되지 못했다. 선거 전략을 진두지휘해야 할 사무총장 등 핵심라인이 공천정국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면서 내부조직은 우왕좌왕했다. ··· (이를 포함한) 당내 계파갈등이 연일 언론을 통해 전달되면서 국민에게 전달하고 싶었던 다짐이나 공약은 모두 묻혔다. ···”
유감스럽지만 이게 현실이다. 필자는 이를 보다 생생하게 되살려주고 싶어서 가능한 한 원문을 그대로 인용했다. 마지막 부분, “계파갈등이 연일 전달(보도)되면서 공약은 묻혔다”가 유독 가슴을 친다. 정치현장을 지켜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부분일 것이다. 민주당에도 타산지적이 될 듯하다. 주변적인 것들이 본질을 밀어내는, 가십(gossip)이 정책을 밀어내는 퇴행적 정치 관행과 보도는 SNS 유튜브 시대에 더 기승을 부리고 있다. 4월 총선에 다가갈수록 더 심해질 것이다.
미리 대비하고 준비하는 수밖에 없다. 남아있는 1년여 시간은 결코 길지 않다. 지금 시작해도 늦다. 혁신공천을 통해 4월 총선에서 승리하고, 정치개혁도 이뤄내야 한다.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이번 공천은 단순한 공천이 아니라 정치교체를 위한 공천으로 인식해야 한다. 공천혁명으로 정치선진화를 앞당겨 한국 정치의 틀을 바꿔야 한다. 언제까지 ‘4류 정치’라는 오명 속에서 헤맬 것인가. 우리도 우리 정치를 ‘K-정치’라고 부르고 싶다.
필자 주요 이력
▷고려대 정치학 박사 ▷동아일보 정치부장 ▷동아일보 논설실장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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