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가 없는 대일외교 비판
‘일제 강제동원 제3자 변제 결정’ 등 윤석열 대통령의 한·일 관계 정상화 노력을 필자는 ‘윤석열 이니셔티브(Initiative)'라고 부르고 싶다. ‘굴욕외교’라는 일각의 비판이 있지만 드물게 주도적인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우리 외교가 독자적으로 뭘 해본 적은 거의 없다. 크고 작은 결정은 모두 미국이 내렸거나 미국의 묵인과 협조 아래 이뤄졌다. 한국은 신생 독립국으로서 국력도 보잘것없었고 미·소(美蘇) 양극화에 기반한 엄혹한 냉전 체제 속에서 발언권을 갖기도 어려웠다. 1991년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전까지 우리에게 외교란 유엔에서 남북 간 표(票) 대결하는 게 사실상 전부였다.
한국이 제 목소리를 낸 것은 1953년 이승만 대통령의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 노태우 정권의 북방정책과 유엔 가입, 김대중 정권의 남북 정상회담 정도였다.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을 관철하기 위해 이 대통령이 단행한 반공포로 석방은 약소국 독자외교의 전설로 남아 있다. ‘윤석열 이니셔티브’를 이런 역사의 변곡점들과 같은 레벨에 놓을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겠지만 한·일 관계의 틀을 바꾸는 중요한 계기가 되리라는 것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우리 스스로가 그런 인식과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비판과 비난만이 능사가 아니다.
‘글로벌 중추국가(Global Pivotal State)'로 우뚝 서겠다는 것은 윤 대통령의 핵심 대선 공약이다. 흔히 ‘GPS’라는 별칭으로도 불리는 글로벌 중추국가는 ‘한반도의 지리적 경계를 넘어 국제 협력과 질서에 선도적 역할을 하는 국가’를 뜻한다. 그런 국가가 되려면 우선 이웃 국가와의 관계부터 다져야 하는 게 상식이다. 집 뒷마당이 늘 소란스럽고 불안해서야 GPS는 물론 무슨 일인들 마음 놓고 할 수 있겠는가.
특별히 새로울 것도 없다. 그동안 한·일 양국 지식인들부터가 입만 열면 “과거사 문제 정리를 통한 양국 관계 개선이 동북아 평화를 위한 첫걸음”이라고 했다. 소위 ‘리버럴’을 자임하는 진보적 인사들일수록 더 그랬다. 한·일 관계를 주제로 한 어떤 토론 자리에서도 결론은 늘 같았다. ‘윤석열 이니셔티브’는 이런 소망과 당위에 기초해 한·일 선린·우호관계를 정립하고 동북아 평화와 번영을 함께 추구해 나가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필요하다면 피해자인 우리가 먼저 강제징용 배상에 나설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한·일 과거사 문제에 대한 발상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거의 무차별적으로 공격당하고 있다.
오므라이스 한 그릇에 뭘 팔아?
한·일 관계 속성상 긍정평가는 기대하기 어렵다고 해도 과도하다는 느낌이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부터 “일본에 조공을 바치고 화해를 간청하는 항복식 같은 참담한 모습”이었다며 영업사원(윤 대통령)이 나라를 판 격이라고 했다. 또 “오므라이스 한 그릇에 국가 자존심과 피해자 인권, 역사의 정리를 다 맞바꿨다. ··· 한반도가 전쟁의 화약고가 되지 않을까, 자위대가 다시 한반도에 진주하지 않을까 두렵다”고도 했다. 그러나 야당의 누구도 “그렇다면 문제의 대법원 배상 판결이 나온 2018년 이후 4년 동안 문재인 정권은 왜 구경만 했느냐”는 질문에는 명쾌하게 답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비판은 물론 정부가 자초한 면도 있다. 로버트 퍼트넘(하버드)의 양면게임이론(two−level game)을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외교란 언제나 상대 국가의 동의와 우리 측의 컨센서스가 함께 충족될 때 소기의 성과를 낸다. 윤석열 정부의 대(對)국민 설득 노력이 좀 더 적극적이고 치밀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기다렸다는 듯이 발표된 일본 초등학교 검정교과서의 역사 왜곡(독도는 일본 고유영토 주장 등)도 사태를 키웠다. 안팎에서 “이게 한·일 정상회담의 결과물이냐” “역시 일본···”이라는 개탄의 목소리가 높다.
복합 경쟁의 시대와 상호의존성의 쇠퇴
국내 대표적 싱크탱크인 아산정책연구원(원장 최강)은 작년 12월 말 ‘2023년 국제정세 전망'이란 연례 보고서를 내놓았다. 주제는 ‘복합경쟁(Complex Competition)'. 국가 간 경쟁이 격화돼 경쟁의 질(質)도, 양상도 그만큼 다층화하고 복잡해졌다는 취지에서다. 과거의 경쟁이 기존 국제 질서를 인정하고 그 안에서 벌이는 경쟁이었다면, 오늘의 경쟁은 미국과 중국 주도로 국제 질서와 체제를 새롭게 재편하려는 경쟁이라는 것이다. “미국은 첨단 과학기술 분야 위주로 중국이 배제된 새 질서를, 중국은 미국 중심의 기존 질서에서 최고가 될 수 없다면 차라리 새로운 세계의 패자(霸者)를 꿈꾸면서 미국을 배제하려 한다”는 것이다.
보고서는 국제사회에서 상호의존성(interdependence)이 쇠퇴하는 것을 우려했다. 상호의존성은 국가 간 과열 경쟁과 갈등 심화를 막아주는 안전판 같은 것이다. 전후(戰後) 국제사회가 전례 없이 긴 평화의 시대를 누려온 것도 상호의존성의 증가 때문이다. 국가들이 서로 더 많이 의존하게 되면서 전쟁은 줄고 공존·공영의 기회는 늘었던 것이다. 국제정치학에서 말하는 이른바 이상주의 또는 제도주의의 요체도 상호의존성에 있다.
국제정치체제론 관점에서도 보자
상호의존성이 후퇴한 자리는 절연(絶緣·insulation) 또는 탈동조화(decoupling)가 채우게 된다. 한 예로 반도체, 배터리, 희토류, 등 미래 기술·소재 관련 분야에서 공급망 재편·분리 시도도 그래서 나왔다는 것. 경쟁의 과열 속에 불신과 불안도 그만큼 커졌기 때문이다. 이제 세계는 △인도‧태평양 지역이 분쟁의 중심지로 떠오르고 △핵확산 금지체제가 불안정해지며 △군비경쟁이 가속화하고 △중근동에 대한 중·러의 틈새 공략이 시도되고 △경제 리스크가 커지고 기술 경쟁과 인권 논쟁도 심화될 것으로 보고서는 전망했다.
복합 경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각 분야에서 다양한 전략, 전술, 해법들이 논의되고 있을 터여서 크게 걱정은 안 한다. 상대적으로 자유롭고 관대했던 개발 시대 이래 관련 대책이나 대안들도 넘쳐나지 않았나. 나는 진부하지만 국제정치체제론(international political system) 관점에서 몇 마디를 보태고 싶을 뿐이다. 국제정치체제론은 일부 비판적 시각도 있지만 여전히 국제정치를 분석하는 가장 명쾌하고 유용한 틀이다.
위험과 기회가 공존할 양극적-다극체제
복합 경쟁이 우리에게 던지는 과제의 핵심은 외교적 재량권의 확대 여부와 선택의 딜레마다. 체제이론의 관점에서 보면 동북아는 미·중에 의한 양극적–다극체제(Bi-Multipolar system)로 이미 접어들었다는 게 내 판단이다. 미·중을 두 개의 극(極)으로 해서 그 주위에 일본, 한국 등 중견 국가들이 포진한 체제 말이다. 일찍이 양극체제가 다극체제보다 더 안정적이라고 주장한 사람은 석학 케네스 왈츠(Kenneth Waltz·1924∽2013년)였다. 구조적 현실주의자인 그는 강력한 두 개의 극(極) 국가에 의해 여타 국가들에 대한 통제가 가능하다고 믿었다.
왈츠의 이런 주장에 대해 로즈크랜스(Richard Rosecrance)는 “양극체제는 기본적으로 제로섬 체제여서 더 위험하다”고 반박하고, 이 두 체제가 결합된 양극적-다극체제가 더 안정적이라고 했다. 이 체제에선 두 개의 극(極)국가-예컨대 미국과 중국-가 체제 밖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조정하는 조정자 역할을 하고, 그 외 다수 국가들은 두 극국가 사이에서 갈등을 중재·완화하는 완충자 역할을 한다. 양극체제와 다극체제의 장점을 결합한 체제다. 나는 지금의 동북아 체제가 여기에 해당된다고 본다. 이 체제에선 엄격한 양극체제보다 상대적으로 중견 국가들의 재량권이 커진다. 기회와 위험이 공존한다는 얘기다. (로즈크랜스가
야당 대표, 좀 더 사려 깊은 비판을
다음은 선택의 딜레마다. 두 강대국, 두 진영 가운데 어느 한쪽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을 피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얘기다. 예컨대 중국은 그동안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이라는 이른바 안미경중(安美經中)에 대해 비교적 관대했지만 미국과 경쟁하는 강도가 세어질수록 더 까다롭게 나올 게 분명하다. 아산정책연구원은 이 딜레마에 대한 대응으로 ‘전략적 명확성(strategic clarity)'을 주문했다. 가치와 체제가 개입되는 지역 및 국제적 쟁점에 대해서는 찬반 입장을 분명히 하는 게 유리하다는 것이다. 그래야 중장기적으로는 투명성의 강화로 상호 신뢰를 확장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공감한다.
설명이 길어졌지만 어떤 나라의 외교도, 대외정책도 단순한 건 없다. 하물며 한·일 관계에서랴. 그 어려움을 알고, 그 복잡함을 알고 거기에 맞게 비판하고 질책해야 한다. 다른 사람도 아닌 야당 대표가 “오므라이스 한 그릇” 운운하는 식의 비난과 조롱이 얼마나 위험하고 터무니없는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 이 자리에서 꼭 엘리트 외교와 대중 외교(mass diplomacy)를 거론해야 하나. 이러니까 “이번 비판 속에 정작 국제(國際)는 없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필자 주요 이력
▷고려대 정치학 박사 ▷동아일보 정치부장 ▷동아일보 논설실장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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