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에는 미국과 중국 간 긴장이 고조되고 우크라이나와 가자지구 전쟁이 계속되면서 지정학이 다시 크게 부상할 것이다. 인플레이션은 하락하고 금리는 평준화될 것이며, 공급망 분단은 완화되고 원자재 가격도 안정될 것이다. 그러나 부유한 국가들의 성장세가 부진한 가운데 세계 GDP(국내총생산)는 2.2% 성장하는 데 그칠 것이다. 개발도상국 경제는 더 나아질 것이지만 중국은 경쟁국에 기업 투자를 빼앗기게 될 것이다. 기업들은 새로운 환경 규제와 글로벌 최저 세율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세계 주요 미디어와 컨설팅기업, 싱크탱크들이 연말에 쏟아내는 내년 정치·사회·경제 전망은 대략 이렇게 요약된다. 내년 전망에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글로벌 임팩트가 가장 큰 항목을 꼽는다면 트럼프 2.0(대선에 승리한 트럼프), 미·중 마찰 지속, 본격적인 AI 시대 도래 등이다. 이래저래 미국과 중국 간 패권경쟁은 어느 분석이나 전망이든 변수가 아닌 상수가 됐다.
이러한 거시적 측면에서 보면 미·중 마찰은 심화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미시적 실태는 전혀 다른 양상이다. 두 나라 기업과 시장에서 보여온 ‘박빙의 교류’는 이제 더 넓고 더 깊게 펼쳐질 전망이다.
그 단서를 살펴보자. 우선 중국 기업이 미국 기업을 향해 흔드는 손이다.
중국계 대기업들이 최근 들어 잇따라 미국 거대 IT 기업의 클라우드 서비스를 도입하고 있다. 중국 전기차(EV) 업체 비야디(BYD)는 아마존닷컴의 클라우드를 도입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미·중 갈등 속에 중국 기업들의 일련의 움직임의 배경에는 세계 시장에서 미국 테크 기업의 영향력 확대가 있다.
전 세계 70여 개국에서 전기차와 플러그인 하이브리드(PHV)를 판매하며 전기차 전문업체인 미국 테슬라를 위협할 정도로 성장한 BYD는 아마존과 손잡고 네트워크를 통해 자동차에 다양한 신기능을 추가할 예정이다.
지난 5월에는 중국 알리바바그룹 산하 동남아시아 인터넷 쇼핑몰 대기업 라자다(싱가포르 소재)가 미국 마이크로소프트(MS)의 클라우드 '애저(Azure)'를 도입했다고 발표했다. MS는 출자회사 오픈AI의 생성형 AI를 애저에 적용해 쇼핑몰 사이트의 고객 문의에 자동으로 대응하는 기능을 개발했다.
중국을 중심으로 동남아시아에서도 클라우드 사업 점유율을 확보하려는 알리바바에 MS는 강력한 경쟁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하 라자다는 MS의 클라우드를 사용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글로벌 사업 확장을 노리는 중국 기업들이 미국 빅테크가 전 세계에 구축한 거점을 이용하고 있는 모습이다.
미국 시장조사업체 시너지리서치그룹에 따르면 올해 7~9월 세계 클라우드 시장 점유율 1위는 아마존이 차지했으며, MS와 구글이 그 뒤를 이었다. 미국 3사가 세계 점유율에서 70%에 육박하는 것. 4위인 알리바바 점유율은 5%를 밑돌며 최근 몇 년 동안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
다음은 미국 시장에서 중국 소비재가 세력을 떨치고 있는 모습이다.
'테무(Temu)'와 '샤인(SHEIN)' 등 중국 전자상거래(EC) 이용이 미국에서 급증하고 있다. 지난 10월 두 앱 이용자는 약 1억1000만명으로 1년 만에 4배로 증가해 최대 업체인 미국 아마존닷컴 대비 90%에 육박했다. 산업 용도를 중심으로 대중국 수입은 줄어들고 있지만, 저렴한 중국산 잡화를 취급하는 두 앱에 대한 소비자의 지지가 높아지고 있어 미국 정부는 경계를 강화하고 있다.
미국 조사기관 통계에 의하면 주요 전자상거래 앱의 월간 이용자, 다운로드 수 등을 국가별로 분석한 결과 10월 세계 전체 이용자는 아마존이 전년 동월 대비 4% 증가한 데 비해 테무와 샤인은 2.6배로 급증했다. 테무는 생활잡화, 샤인은 의류를 중심으로 다양한 상품을 취급한다. 젊은 층을 중심으로 지지를 받고 있으며, 두 앱의 미국 내 신규 다운로드 수는 현재 아마존 대비 5배에 육박한다고 한다. 테무는 2022년 9월 서비스를 시작한 지 1년 만에 이용자 수에서 미국 이베이, 샤인 등 경쟁사를 앞질렀다. 10년 가까이 미국에서 온라인 쇼핑을 해온 샤인도 최근 1년 새 이용자를 두 배로 늘렸다.
잇따른 수입 금지 조치 등 영향으로 기업 간 거래가 중심이 된 미·중 무역은 정체된 상태다. 미국의 상품 수입에서 차지하는 비중에서 중국은 2023년 1~6월 멕시코에 밀려 15년 만에 국가별 1위 자리를 빼앗겼다. 기업들이 대중국 수입을 자제하는 가운데 인플레이션으로 저렴한 물건을 찾는 소비자들은 개인적으로 대중국 수입을 늘리고 있다.
시장 전문가들은 중국계 전자상거래 부상에 대해 "중국은 물건을 싸게 만드는 것이 강점이었는데 효율적인 물류와 편리한 앱 개발력이 더해져 기업을 거치지 않고 해외 소비자와 직접 연결할 수 있게 됐다"며 "2022년 이후 물가 상승으로 더 싼 물건을 찾는 미국 내 소비자들의 수요를 끌어들이고 있다"고 분석했다.
물론 중국계 서비스가 부상하는 데 대한 우려도 확산되고 있다. 미국 연방의회 초당파 위원회는 지난 6월 테무와 샤인이 신장위구르자치구에서 강제노동에 연루됐을 가능성이 있다며 실명으로 비판하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에 앞서 짧은 동영상 앱인 '틱톡(TikTok)'에 대한 규제론이 거세게 일었다. 미국에서는 정부기관 공용 단말기에서 사용이 금지됐고, 몬태나주에서는 사업을 금지하는 주법이 통과됐다. 틱톡은 미국을 비롯한 각국에서 전자상거래 기능을 강화하고 있지만 인도네시아에서는 지난 9월 정부가 SNS상에서 전자상거래를 금지하는 제도를 만들자 틱톡이 전자상거래 기능을 중단하기도 했다.
이 같은 규제와 관련해 법률 전문가들은 미국 기업들도 전 세계에서 전자상거래를 전개하고 있는데, 이것까지 '안보' 프레임워크에 포함될 것 같지는 않다고 진단한다.
이런 가운데 싱가포르에 본사를 둔 샤인이 지난 11월 27일 기업공개(IPO)를 미국 당국에 신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2024년 상장을 목표로 하고 있다. 미국 CNBC 방송 등에 따르면 현재 기업가치는 약 660억 달러(약 100조원)에 달한다. 골드만삭스, 모건스탠리, JP모건체이스가 매각 주관사를 맡는다고 한다.
샤인은 앞서 지난 8월 미국 의류 브랜드 '포에버21'과 전략적 제휴를 하고 상호 출자하기로 했다. 패스트 패션 분야의 인터넷 쇼핑몰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다. 미국에서 샤인 인기는 2010년대에 진출한 '자라(ZARA)' 'H&M' 등 유럽 브랜드를 능가한다. 매일매일 새로운 제품을 대량으로 판매하며 젊은 층에게 지지를 받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지난해 전 세계 샤인 매출은 약 230억 달러에 달했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이번 주 아마존닷컴이 미국에서 내년 1월부터 가격 15달러(약 2만2000원) 미만인 의류에 대해 외부 판매자가 지불하는 수수료를 5%로 기존(17%) 대비 3분의 1 이하로 낮추고, SNS에서도 상품을 쉽게 구매할 수 있도록 한다고 발표했다. 온라인 쇼핑 전체에서 상품 1개당 물류 서비스 등 수수료가 내년에 소폭 상승할 것으로 전망되는 가운데 의류 수수료 인하는 이례적인 일이다.
의류는 아마존에도 주력 분야다. 미국 JP모건에 따르면 2022년 아마존 유통 총액 중 16%를 차지해 전자제품(26%), 생활용품·식품(22%) 다음으로 크다. 아마존은 미국 전자상거래의 의류와 장식품 분야에서 40% 점유율을 보이고 있지만 샤인이 플랫폼 사업자로서 입지를 다지면 위협이 될 수 있다.
전자상거래 기능을 강화하고 있는 틱톡의 존재도 만만치 않다. 미국 이용자(1억5000만명)는 하루 평균 90분을 틱톡을 하며 보낼 정도로 체류 시간이 길다. 동영상 시청 이력을 바탕으로 관심 상품 등을 표시하는 기술도 뛰어나다. 아마존은 최근 들어 중국계 전자상거래를 의식한 대책을 속속 내놓고 있다.
뿐만 아니라 미국 빅테크와 중국 정부의 빈번하고 다양한 접촉도 간과할 수 없는 대목이다.
미·중 갈등으로 지정학적 리스크를 안고 있는 미국 기술기업들이 중국 정부와 대화를 모색하고 있다. 브래드 스미스 MS 사장은 지난 12월 6일 왕원타오(王文濤) 중국 상무부장(장관)과 회담을 했다. AI 분야 협력과 미·중 무역 관계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 왕 부장은 회담에서 "AI 관련 중·미 간 교류와 협력에 건설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MS를 포함한 다국적 기업의 중국 사업 진출을 환영한다고 말했다. 스미스 사장은 "중국 경제의 디지털 전환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이라며 중국 시장을 중시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2023년 들어 팀 쿡 미국 애플 최고경영자(CEO)와 일론 머스크 미국 테슬라 CEO가 잇따라 중국을 방문했다. 미국과 중국이 정치적으로 대립하고 있는 가운데 미국 기술기업 경영진은 중국 정부와 대화를 통해 지정학적 리스크를 완화하려 하고 있다. 지난 6월 빌 게이츠 MS 공동창업자는 베이징에서 시진핑 주석을 만나 4년 만에 중국을 방문했다고 블로그를 통해 밝혔다. 건강, 기후변화 등 사회적 과제에 대한 대응을 논의했다고 한다. MS는 중국 진출 30주년을 맞았다. 게이츠는 경영에서 손을 뗐지만 친선 역할로 비즈니스 측면에서 미·중 관계 악화로 인한 영향을 완화하는 역할을 사실상 맡고 있다.
지난 11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가 열린 미국 샌프란시스코 시내 호텔에서 열린 시진핑 주석 주최 만찬회는 이러한 미국 기업과 중국 정부의 관계를 표면으로 드러낸 상징적인 이벤트였다. 팀 쿡 애플 최고경영자(CEO)를 비롯해 퀄컴, 보잉, 제약회사 화이자 등 수장들이 참석했다. 참석 기업의 공통점은 사업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는 점이다. 예컨대 애플은 2023년 7~9월 매출 중 17%를 홍콩 등을 포함한 중화권이 차지했다. 주력 제품인 아이폰 등의 제조도 중국에 의존하고 있다. 퀄컴은 23년 9월 매출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이 62%였다.
중국과 가장 긴밀한 관계에 있는 한국은 이러한 미국과 중국 간 관계 개선 움직임을 지금부터 특히 주목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새해에는 미·중 관계를 기업과 시장의 눈으로 간파해 새로운 대중(對中) 전략을 수립할 필요가 있다.
곽재원 필자 주요 이력
▷전 중앙일보 경제부국장, 도쿄특파원 ▷전 서울대 공과대학 초빙교수 ▷전 한양대 기술경영학 석좌교수 ▷전 경기도 경기과학기술진흥원 원장 ▷현 가천대·호서대 초빙교수 ▷현 아주경제 논설위원장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