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의승 서울시 행정1부시장은 민선 8기 오세훈 시장 취임과 함께 서울시 2인자로 임명됐다. 부시장 임기는 통상 1년이지만 그는 그 기간을 훌쩍 넘겨 1년 6개월간 재임했다. 그의 어깨에는 오심(吳心)이 한껏 실렸다. 후배들에게는 존경과 두터운 신뢰를 받았다. 하지만 이제 그는 용퇴했다. 오심을 더 받들 수 있었으나 여기까지. 후배들을 위해서였다.
그는 한 사석에서 "퇴임하는 날 눈물이 날 것 같다"는 말을 되뇌었다. 그때 그의 눈가에는 이미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는 서울시 혁신리더십의 표상이요, 그의 고향 경북 안동시의 자랑이다. 기자가 김 부시장과 인터뷰를 하던 지난 19일 저녁 서울 시내에는 함박눈이 수북이 쌓였다. 마치 첫눈이 내리던 안동역처럼 말이다. 김 부시장은 30년 넘는 공직을 마무리하고 고향인 경북 안동으로 귀향한다. 다음은 일문일답.
-서울시 분위기로 볼 때 부시장 용퇴는 빠른 것 같은데.
"사퇴해야죠. 후배들이 있는데···. 그리고 윗분을 더 크게 모시면 되죠.('윗분이 누구냐'는 물음에는 염화시중(拈華示衆·꽃을 따서 무리에게 보인다는 뜻으로 말이나 글에 의(依)하지 않고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뜻을 전(傳)하는 일)이었다.)
"1993년에 임용돼 31년간 공직에 있었다. 쏜 화살처럼 빠르게 지나간 세월이었지만 돌이켜보면 불같이 뜨겁게 살고자 했고, 무사안일 공무원이 되지 않으려 무던히 노력했던 나날이었다. 아쉽고 안타까운 시간도 있었지만 결단코 후회는 없다. 미국 시인 랠프 윌도 에머슨의 시 ‘무엇이 성공인가’의 나로 인해 단 한 사람의 인생이라도 행복했다면 그것이 진정한 성공이라는 시구를 한시도 잊은 적 없고 충실히 실천하고자 했다. 하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멀고, 해야 할 일이 많다고 생각한다."
-인생의 절반 이상을 서울시에 몸담았다. 공직생활 중 보람 있었던 일은.
"모든 일을 성심을 다해 추진했기 때문에 사업 하나하나가 중요하고 보람있었다. 관광체육국장 시절 발령 첫날 밤을 꼬박 새워 틀을 짠 ‘서울관광 정상화 계획’을 체계적으로 추진해 이듬해 중국 중마이그룹 임직원 8000명이 한강에서 삼계탕 파티를 열었던 일은 전 세계 미디어의 주목을 받았고 서울관광이 다시 활기를 찾는 신호탄이 됐다. 서울시민 삶의 질 향상을 위해 고농도 미세먼지 발생이 잦은 겨울철부터 이른 봄까지 한층 강력한 저감 대책을 가동해 미세먼지를 집중 관리하는 ‘미세먼지 시즌제’도 전국 최초로 시행해 서울시민에게 맑은 하늘을 선물한 기후환경본부장 시절도 기억에 많이 남는다. 또 서울 경제를 살리고 시민을 행복하게 한 일 모두가 보람이었다."
-경제정책실장 시절 개관한 ‘G밸리산업박물관’에는 최근 윤석열 대통령도 다녀갔다.
"1960년대 구로공단부터 21세기 G밸리까지 반세기가 넘는 구로공단 역사를 기념하기 위한 국내 최초 산업박물관인 'G밸리산업박물관'은 개관까지 몇 차례 고비가 있었지만 콘텐츠가 풍부한 유일무이한 근대역사박물관이라는 평을 듣고 있다. 대통령께서 지난 8월에 박물관을 직접 방문해서 둘러보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전임 시장 재임 시에는 풍파가 많았다고 들었다.
"전임 시장 임기 시작 때 인사과장 자리에 있었는데 이전 오세훈 시장과 손발을 맞췄던 1급 관리자 5명을 동시에 내보내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직접 상사 방에 들어가서 명예퇴직 신청서를 받아들고 나오는 길에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흐른 적도 있었다. 업무적으로도 어려움이 있었는데 오 시장이 추진하던 일은 모두 스톱됐다. 세빛둥둥섬, DDP 등을 대표적인 예산 낭비 사업이라고 비판하며 완공됐음에도 몇 년간 문을 못 열도록 막았고 월드컵대교는 공사를 계속 미룬 탓에 국내 교량 중 약 14년이라는 최장 공사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또 시장을 등에 업고 민간‧시민단체가 호가호위하는 탓에 공무원들이 정책 추진을 제대로 못함은 물론 끌려 다니는 상황으로까지 치달았다. ‘서울시정의 잃어버린 10년’, 정말 그 한 단어로 설명 가능한 시간이었다."
-기조실장 시절 민주당 우위인 시의회에서 오세훈표 예산을 관철시킨 것으로도 유명하다.
"당시 더불어민주당이 다수 의석을 점하고 있던 시의회가 상임위 심사 단계에서 주요 사업 예산을 줄줄이 삭감했다. 시민들 삶은 물론 안전, 편의와 직결된 사업을 단순히 정치적인 이해관계로 좌지우지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오로지 팬데믹 장기화로 지칠 대로 지친 시민들 민생과 일상 회복을 위해 필요한 예산을 사수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기조실장 임무 중 가장 중요한 게 서울시장과 시의회 중간에서 정책과 예산을 조율하는 것 아니겠나.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공직 입문 30년 만인 2022년 드디어 직업공무원으로서 최정점인 행정1부시장 자리에 올랐다.
"우선 1000만 서울시민 삶과 살림을 꾸려 나가는 중요한 자리에 올라 책임감은 물론 빈틈없이 정책을 추진하고 또 시민 안전과 행복을 돌보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부시장으로 재임한 기간에 오케스트라를 이끄는 지휘자로서 모든 영역에 대해 세밀하고 정교하게 접근하고 조화를 이루는 데 중점을 뒀고, 체감할 수 있는 정책 추진에 집중했다. 공직 생활 중 가장 바쁘고, 가장 많은 고민이 있었지만 동시에 가장 많은 보람과 기쁨을 느꼈던 기간이었다. 후회 없이 열심히 성심을 다해 달려온 1년 6개월이었다."
-그때 힘들거나 어려운 점은 없었나.
"힘들고 어렵다기보다는 아직도 먹먹해 밤잠을 이루지 못하는 일이 있다. 바로 2022년 10월 이태원 참사다. 오 시장이 유럽 출장 중이라 부시장인 제가 재난안전대책본부장을 맡아 사고 수습을 총괄했다. 시민 안전을 책임져야 하는 서울시 관리자 중 한 명으로서 책임을 통감하고, 또다시 이런 사고가 재발하지 않도록 지금 이 순간에도 서울시정 전반에 ‘안전’이라는 키워드를 장착해 매 순간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 힘썼다."
-사상 최악으로 기억될 수 있었던 지난여름 잼버리 대회를 K-문화체험의 장으로 승화시키며 그야말로 저력을 보여줬다.
"서울시는 대규모 행사를 많이 치른 경험과 노하우가 있고 인프라나 시스템이 탄탄하게 갖춰져 있어 빠른 대응은 물론 내실 있는 지원이 가능했다. 대책본부를 꾸리고 본부장을 맡아 잼버리 대원들이 안전하고 보람 있게 남은 일정을 소화하고 좋은 추억을 간직하고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 데 집중했던 기간이었다. 일단 하루 만에 3200여 명이 묵을 수 있는 서울 시내 숙소 13곳을 확보하고 서울 대표 명소인 한강, 남산, 광화문광장 등 곳곳에 대원들이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행사와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중복 참여를 포함해 이 프로그램에 참여한 대원이 5만명 이상이었다. 이런 성공의 바탕에는 휴가까지 반납하고 지원한 서울시 직원들, 앞다퉈 자원봉사를 신청해주신 시민들이 있어서 가능했다. 제 저력이 아니라 우리의 저력이었다."
-워커홀릭, 똑부 등 이는 모두 김의승 부시장을 칭하는 말이다.
"부정하진 않겠다. 성격이 매사 꼼꼼하고 다시 한번 확인하고 맡은 일은 끝장을 보는 면이 있다. 또 정책 아이디어도 많은 편이다. 하지만 일하는 동안 직원들에게 부담을 주거나 몰아붙여서 일을 해결해 본 적은 없다. 함께 저녁 회식을 하고 다시 조용히 들어와서 일을 직접 끝낸다든지 하는 그런 기억은 있지만···."
-유학 시절에 수석 졸업한 일은 지금까지도 공무원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는데.
"그 당시 한 방송에서 공무원들이 유학 가서 공부는 안 하고 골프만 즐긴다는 보도가 난 적 있었다. 일부 일탈이라 할지라도 같은 공직자로서 너무 낯 뜨거운 일이었다. 그러던 중 유학이 결정됐는데 기왕 가는 거 제대로 하고 와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미국 포틀랜드주립대 행정대학원 행정학 석사과정에 입학해서 2년간 다시 하라면 못할 정도로 열심히 공부했다. 담당 교수에게 사전에 허락을 받고 전 과목 녹음해서 집에 와서 몇 번이고 반복해서 들으면서 복습을 했다. 그런 노력 덕분에 졸업식 때 최우수국제학생상과 최고학점상을 동시에 거머쥐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우수 공무원을 자기 대학에 보내줘서 고맙다고 담당 교수가 오세훈 시장에게 직접 친서를 보냈다고 했다."
-서울도서관 꿈새김판에 직접 캘리그래피를 직접 써서 주변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고 하는데.
"살면서 글 한 줄이 그 어떤 보상보다 힘이 되고 울림을 줄 수 있다는 생각에 같이 고생하는 직원들에게 좋은 글귀를 나누면 격려하고 응원하자는 생각에서 시작한 일이다. 틈틈이 연습해 직접 쓴 캘리그래피를 직원들에게 주면 작은 정성에 너무 크게 반응하며 좋아해서 그 모습에 더 치유받고 보람을 느꼈다. 그러던 와중에 꿈새김판에 직접 글을 써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았고 조용히 재능기부한 게 우연치 않게 기사화됐다. 같은 문구를 여러 명에게 줄 수 없어 받는 사람에게 의미 있는 새 문구를 찾는 게 요즘은 가장 힘들다."
-직원들 이름도 다 외우고 늘 존대한다고 들었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나.
"서울시민을 위해 매일 머리를 싸매고 발로 뛰는 직원들 이름을 기억하고 가슴에 새기는 것은 관리자로서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직위, 나이를 막론하고 서울시 구성원으로 서로 존대하고 존중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생각이다."
-후배들에게 해줄 말은, 그리고 향후 계획은.
"공직자로서 후회 없이 일하고 봉사하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안도현의 시 '너에게 묻는다'의 '연탄처럼 온몸을 불살라 누군가를 따뜻하게 해주고 하얗게 재만 남기듯 살아야 한다'는 숙명에 보람을 느끼기를 바란다. 저는 앞으로도 어떤 일을 하건 연탄처럼 쓰임받길 바라고 있다. 서두에 말한 것처럼 나로 인해 단 한 명이라도 행복해질 수 있도록 성공적인 삶을 사는 것이 향후 계획이다."
◆김의승 전 서울시 부시장, 그는 누구인가
김의승 전 서울시 부시장에게는 업무 관련 일화가 많다. 그는 서울시 초대 관광국장을 지냈다. 그 시절 메르스로 중국인 관광객이 반 토막 나자 직접 중국으로 떠났다. 관광객 유치를 위해서였다. 중국어도 할 줄 몰랐지만 주경야독으로 독파를 한 뒤였다. 중국에 도착해 현지 여행사는 물론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쇼핑몰, 거리 등지에서 서울 알리기에 나섰다. 수준급 중국어로 현지에서 직접 프레젠테이션을 했다. 그 노력으로 다음 해 중국인 관광객이 대거 서울을 방문하는 쾌거를 이뤘다. 지난 여름 잼버리 사태 때에도 그는 마케팅력을 발휘해 사태를 원만히 수습함으로써 일등 공신으로 꼽힌다. 업무는 물론 인간적으로도 따뜻한 면모가 돋보였다는 평이다. 직원들 사이에 그는 소통왕으로 통했다. 승진은 물론 부서 이동 때마다 직원들에게 일일이 연락해 축하하고 응원하는 간부로 유명했다. 그는 서울시와 함께한 30여 년간 시장을 총 10명 모셨다.
◆김의승(金意承) 부시장 약력
△1966년 경북 안동
△고려대 행정학과
△서울대 행정대학원 행정학과
△포틀랜드주립대학원 행정학과
△행정고시 36회 합격
△서울시 행정사무관 임용
△서울시 행정과장
△서울시 인사과장
△서울시 경제정책과장
△서울시 일자리기획단장
△서울시 행정국장
△서울시 관광체육국장
△서울시 대변인
△서울시 기후환경본부장
△서울시 경제정책실장(1급·지방관리관)
△서울시 기획조정실장(국가직 고위공무원)
△서울시 행정1부시장 직무대리
△서울시 행정1부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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