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후 4년간 우리나라 의회 민주주의를 이끌게 될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총선거가 열흘 남짓 앞으로 다가왔다. 전체 투표의 3분의 1가량이 이뤄지는 사전투표일까지는 닷새도 채 남지 않았다.
여야 모두 총력전이다. 정치가 말로 하는 전쟁이다 보니 특정 지역과 계층을 겨냥한 메가톤급 핵무기 투하부터 저인망식 기총 소사까지 유권자 공략을 위한 온갖 전술·전략이 동원되는 모습이다.
기대만 부풀렸다 선거 뒤에는 나몰라라 할 게 자명한 공약이 대부분인 탓에 옥석 가리기 자체가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괜스레 사회적 염세주의만 부추기는 꼴이다.
뻔뻔하고 음흉하기까지 한 말의 성찬과 이슈 몰이를 접하고 있자면 중국 근현대 사상가 리쭝우(李宗吾)의 식견에 다시 한번 찬사를 보낼 수밖에 없다.
리쭝우는 얼굴이 두껍고 마음은 검다는 뜻의 '후흑학(厚黑學)' 주창자로 유명하다. 작게는 일종의 처세술, 크게는 경세론으로 볼 수 있는데 요체는 실리를 얻기 위해 철면피가 되라는 것이다.
후흑학에서 거론하는 '일을 처리하는 두 가지 묘법(辦事二妙)'을 들여다보자. 먼저 솥 때우기(보과·補鍋)다. 땜장이는 주인 몰래 솥 바닥 작은 구멍을 크게 키운 뒤에야 땜질에 나선다. 주인은 어떻게든 문제가 해결됐다는 데 오히려 감사함을 느낀다.
우리 내부로 눈을 돌리면 정부와 의료계 간 이른바 의·정 갈등이 대표적 사례다. 2000명 증원을 밀어붙이며 갈등을 최대치로 증폭시킨 게 현 단계다. 이제 윤석열 대통령이나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나서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차례다.
증원 규모를 양보해 500명이든 1000명이든 관철해 내면 역대 어느 정부도 해내지 못한 일에 성공했다고 자화자찬을 늘어놓을 것이다. 이반된 민심도 어느 정도 되돌릴 수 있을 터다. 물론 이런 협상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는 별개의 문제다.
연구개발(R&D) 예산 삭감 논란도 마찬가지다. 정부는 올해 R&D 예산 규모를 14.8%나 칼질했다. 과학계의 거센 반발 속에 대학 연구실 불이 꺼질까 노심초사하는 국민들이 많다. 상황 전개를 관전하던 정부와 여당은 내년 예산을 짤 때 R&D 지원액을 지난해(31조원) 수준으로 늘리겠노라 공언했다. 조삼모사와 다를 바 없는 행태인데도 관련 종사자들은 가슴을 쓸어내린다.
이번에는 '화살대 썰기(거전·鋸箭)'다. 어떤 이가 화살을 맞아 외과의를 찾았다. 의사는 톱으로 화살대를 잘라낸 후 사례를 요구한다. 살에 박힌 화살촉은 어쩌느냐고 환자가 묻자 그 일은 내과 소관이라고 둘러댄다. 근본적 치유 없이 대증 요법에 의존하거나, 스스로의 책임을 최소화하는 행태의 전형이다.
서민 가계를 피폐하게 만드는 고물가가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식으로 1년 넘게 지속되는 중이다. 올 들어서는 작황 부진 등 여파로 사과를 비롯한 신선 과일·채소 가격이 천정부지로 올라 부담이 가중되고 있다. 할인 지원금 1500억원 투입, 수입과일 대거 공급, 업계의 가격 인상 제동 등 조치가 없는 건 아닌데 '대파 한 단 875원' 언급에 유권자 마음은 얼어붙는다.
금융투자소득세를 폐지하겠다거나, 국회를 세종시로 완전 이전하겠다는 둥의 정부·여당발 공약도 마찬가지다. '가려운 데 긁어 줄게. 현실화 여부는 나중 얘기고' 식이다.
야당은 다른가. 기본 지원금 25만원 지급, 기본 주택 100만 가구 건설 등이 공약집을 도배한다. 세수 부족 속 재원 마련이 녹록지 않은 건 차치하고 집행권조차 없는데 말이다.
기실 '거전'과 '보과', 더 나아가 후흑학은 자신의 역량을 재단한 뒤 유연성과 분별력을 가미해 일을 되게 만드는 기교와 방법론이다. 음흉함과 뻔뻔함은 그 와중의 수단일 뿐이다. 이번 총선에서는 얼굴이 두껍고 속이 숯처럼 검을지언정 산적한 과제를 풀어낼 능력을 지닌 일꾼들이라도 합류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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