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에 고령자와 장애인, 임신부 등이 안심하고 마트에서 장을 볼 수 있는 ‘슬로 계산대’가 등장해 화제다. 고령자 인구가 많은 한 지방 도시에서 시작된 것으로, 뒷사람 눈치를 보지 않고 마음 편히 계산할 수 있다는 점이 호응을 얻으며 전국으로 확대되고 있다.
일본을 여행해 본 사람이라면 현지에서는 아직도 물건을 살 때 현금을 내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본은 여전히 현금 선호가 뿌리 깊어 캐시리스(cashless·비현금 결제) 문화가 대세라고 하기는 어렵다.
일본 캐시리스추진협의회에 따르면 2023년 말 기준 일본 캐시리스 결제 비율은 39%에 그쳤다. 한국이 90% 이상이고, 중국도 80%를 넘는 것과는 대조를 이룬다. 특히 고령자 세대는 카드나 간편 결제 서비스보다는 현금을 사용하는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다.
셀프 계산대 조작에 익숙하지 못한 노인이나 손발이 불편한 장애인, 어린 자녀와 함께 마트에 온 주부들은 슬로 계산대를 찾는다. 계산대에 선 80세 남성은 지갑에서 1엔짜리 동전을 찾느라 애를 먹자 계산원에게 “뒷사람 신경 쓰지 말고 천천히 주셔도 된다”는 말을 들었다.
해당 마트는 2020년 치매환자를 돕는 한 NPO(비영리) 법인 주도로 슬로 계산대를 운영하고 있다. 마트 측으로서도 환영이었다. 계산대 앞에서 시간을 끄는 노인에게 혀를 차거나 재촉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기다리는 사람들 눈치를 보느라 잔돈은 꺼내지도 못하고 계속 지폐로만 지불하는 바람에 늘 동전 지갑이 빵빵한 노인도 목격됐다.
‘슬로 계산대’ 도입 초기에는 한 달에 2회 2시간으로 한정해 운영했다. 이후 쇼핑객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으면서 현재는 상설 운영 중이다. 2021년부터는 전국 매장으로 확대했다.
한편 이 같은 움직임은 늘고 있는 인지증(치매) 환자의 사회 생활을 돕는다는 측면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일반적으로 75세를 넘으면 노화로 인해 질병과 부상 위험이 커지고 치매도 늘어나는 경향을 보인다. 위험 부담이 커지는 만큼 이들에게 건강한 생활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관련 사회 복지 비용도 증가하게 된다.
이와테(岩手)현의 한 의사회가 창설한 ‘인지증 지원 지역네트워크(이하 네트워크)’는 일본에서 처음으로 2019년에 ‘슬로 쇼핑’ 개념을 도입했다. 이들은 치매 환자의 장보기를 돕거나 교류 공간을 마련해 인지력에 문제를 겪는 사람들의 자신감과 존엄성 회복에 힘을 쓰고 있다.
예를 들어 이와테현 다키자와(滝沢)시의 한 마트에서는 매주 목요일 오후 1~3시에 한해 ‘우선(優先) 계산대’가 운영된다. 네트워크 협찬 기업의 차에 이용자를 태워 이용자가 원하면 함께 마트 안을 돌며 장을 보고 ‘우선 계산대’에서 장바구니에 물건을 담는 것까지 돕는다.
지금까지 이 서비스를 이용한 사람은 5000명을 넘는다. 스스로 장을 볼 수 있게 된 치매 환자들 가운데는 이전보다 말수가 늘거나 의욕적인 태도를 보이는 등 변화가 나타나기도 했다. 2022년에는 일본 경제산업성에도 ‘정신 건강 상태가 향상됐다’는 내용이 보고됐다.
한국도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들 만큼 인구 고령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 중인 가운데 식음료 가게와 프랜차이즈 식당을 중심으로 한 키오스크(kiosk) 도입으로 이용에 어려움을 겪는 노인들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시간이 초과되어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보다 뒷사람 눈치를 보는 게 힘들어 주문을 포기하기도 한다. 장애인이 사용할 수 있는 배리어프리(Barrier Free) 키오스크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실정이다.
한국 역시 고령화와 함께 치매가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고 있는 상황이다. 최근 발표된 한 통계에 따르면 2050년에는 65세 이상 고령층 중 약 7%가 치매에 걸린다는 전망이 나왔다. 한국의 치매 유병률은 약 10%로, 전 세계적으로도 높은 수준이다.
일본의 치매 환자는 올해 최대 730만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고령화를 먼저 겪으며 정부와 지역사회가 치매 관리 시스템을 체계적으로 마련하고 있는 일본 사례는 참고가 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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