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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희 칼럼] '4세 고시' 방치는 교육당국 직무유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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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희 국제언어대학원대학교 총장
입력 2025-03-19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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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희 국제언어대학원대학교 총장
[이재희 국제언어대학원대학교 총장]
 
우리나라 학교에서 1960년대 말까지 세칭 일류 공사립 중학교 입학시험 준비로 국민학교(현재 초등학교) 학생들이 교과서는 물론 참고서(‘전과’)를 암기하면서 재수 또는 삼수까지 하는 불행한 시절이 있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1969학년도부터 3년에 걸쳐 연차적으로 중학교 입학 시험제도를 폐지하고 무시험 추첨 배정제를 실시함으로써 초등학교 교육의 정상화를 위한 기반을 마련했다.
며칠 전 초등학교 6학년인 손녀가 다니는 학원의 영어 교재와 숙제를 보면서 암기 위주 교육이 오늘날에도 살아 있음을 확인했다. 교재 내용은 영문법으로 배열되어 있고, 각 단원은 문법 설명과 연습문제로 구성되어 있었다. 또한 일부 지역에서 유명 학원에 입학하기 위한 시험으로 ‘7세 고시’가 등장하더니 유명 영·유아 대상 학원에 가기 위한 ‘4세 고시’도 등장했다고 한다. 학원의 이런 현상들이 전형적인 암기교육과 선행학습이다.
우리나라 학원은 방과 후 시간에 부모와 학교의 돌봄 공백을 메꿔주거나 학생의 부족한 공부를 보충해주는 과외교습 시설로서 ‘필요악’으로 존재해왔다. 한국교육개발원 '교육통계연보'(2025.1.23.)에 의하면 2024년 전국 학원 수는 9만385개이다. 또한 작년 8월 교육부가 발표한 '2024년 교육기본통계'에 의하면 전체 학생 수는 568만4745명인데 유치원생은 49만8604명으로 8.8%, 초등학생은 249만5005명으로 43.9%, 중학생은 133만2850명으로 23.4%, 고등학생은 130만4325명으로 22.9%를 차지한다. 유치원생과 초등학생이 절반 정도, 중학생과 고등학생이 나머지 절반을 구성한다. 전체 학생 중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유치원생과 초등학생에게 학교에서 방과 후 돌봄교육을 제공한다면 학원에서 암기 교육으로 ‘학대’당하는 학생들을 구원할 수 있지 않을까.
학원의 과도한 교습비와 선행학습은 줄곧 비판을 받아 왔지만 공교육에 악영향을 미치는 암기 위주 교육 방법은 비판의 범위 밖에 있었다. 학원 교육이 비록 개인이 선택한 것이라 해도 교육 비용과 내용 및 방법은 해결해야 할 사회적 문제이다. 첫째, '학원의 설립·운영 및 과외교습에 관한 법률'(이하 학원법)에 교습비에 관한 조항이 있고, 교습비가 과도하면 감독기관인 시도 교육청이 단속을 하기도 한다. 특히 ‘영어유치원’이라 불리는 ‘유아 대상 영어학원’은 유아교육법에서 정한 유치원이 아니라 학원이어서 명칭 자체가 불법이고, 사교육비 폭등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되고 있다. 하지만 학원 교습비는 수요와 공급의 원리에 따라 결정되는 경제 현상이어서 인위적으로 조정하기는 어렵다.
둘째, 학원에서 제공하는 과외교습 내용은 국가교육과정의 학년 수준을 과도하게 넘은 선행교육이어서 학생 학대에 가깝다. 2014년에 제정된 '공교육 정상화 촉진 및 선행교육 규제에 관한 특별법'(이하 선행학습금지법)은 공교육을 담당하는 초·중·고등학교 교육과정을 정상적으로 운영하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다. 선행학습금지법에서는 ‘학원, 교습소 또는 개인과외교습자는 선행학습을 유발하는 광고 또는 선전을 하여서는 아니 된다’고 규정하고 있을 뿐 선행학습을 실질적으로 규제하거나 처벌할 근거는 없다. 이처럼 공교육에서 선행학습을 금지하자 사교육으로 이동하여 선행학습금지법은 ‘사교육 활성화법’ 또는 ‘학생 학대법’이 될 거라는 우려가 있었는데, 이제 그것이 현실이 되었다.
셋째, 학원의 암기식 영어 문법 교육 방법은 국가교육과정의 방향과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영어 의사소통능력 향상에 방해가 된다. 광복 이후 우리나라 영어과 교육과정은 10차례 이상 개정되면서 의사소통능력 배양을 위한 방향으로 변화해 왔다. 하지만 개정된 교육과정 방향에 따라 교육부와 학교가 영어평가를 개선해야 했는데 학업 성취도평가와 수능시험은 여전히 객관식 선다형 시험에 머물러서 공교육과 사교육에서 암기식 영어 문법 교육이 변하지 않고 있다. 학생들은 학업 성취도평가와 수능시험에 대비하여 오답 노트를 작성하면서 반복 학습하여 실수를 줄이는 연습을 한다. 학년 진도에 맞게 국가교육과정을 이수하면서 반복 학습을 하려면 미리 공부를 해두는 방법밖에 없기 때문에 선행학습을 하게 된다. 이런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창의적 사고력은 기를 수 없게 된다.
사교육이 안고 있는 세 가지 문제점 중 사교육비는 경제활동 영역이라 교육계의 노력만으로 해결될 수는 없지만 현행 사교육의 내용과 방법은 교육당국이 장기적인 노력을 기울이면 해결될 수 있다. 이를 방치하는 것은 교육부와 교육청의 직무유기다. 학원의 사교육에서 암기식 반복 학습을 하는 것은 창의적 사고력을 기르려는 국가교육과정에 역행하기 때문이다.
국가교육위원회가 암기 위주 교육을 근절하여 창의력을 가진 미래 인재를 양성하도록 조속히 교육개혁안을 제시해야 한다. 현행 객관식 선다형인 학교평가와 대입시험을 주관식 서술형으로 개혁하고, 학교 현장에서 교수·학습 방법을 국제 바칼로레아(IB) 교육으로 변화해야 한다. 그리고 새로운 교수·학습과 평가 방법이 정착될 때까지 교육부와 교육청은 선행학습금지법과 학원법 등 현행법을 엄정하게 집행해야 한다. 학습 대상자의 학년과 학습 능력에 비해 과도한 수준의 강좌 수강 금지 등 강력하면서도 현실성 있게 법 집행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선행학습은 근절할 수 없다.
지금까지 학원 사교육은 공교육에서 방과 후 돌봄교육의 공백을 메워주는 필요악 또는 동반자 역할을 했다. 이제는 선진국처럼 학교에서 돌봄교육과 방과 후 교육을 제공해야 하고, 이를 위한 인력과 예산을 확보해야 한다. 교육부와 교육청은 사교육의 내용과 방법에 관한 문제를 ‘사교육 카르텔·부조리 신고센터’ 같은 임시 부서에 맡길 일이 아니다. 선행학습금지법과 학원법의 빈틈을 보완하고 엄격히 적용하여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상설 부서를 설치하여 학원 관련 업무를 전담하도록 해야 한다. 교육당국이 이 문제에 미온적으로 대처하거나 방치하는 것은 직무유기다.


이재희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사범대학 영어교육과 졸업 ▷서울대 대학원 교육학박사 ▷한국교육개발원 선임연구원 ▷미국 텍사스대(오스틴) 연구교수 ▷한국초등영어교육학회 회장 ▷경인교육대학교 6대 총장 ▷국제언어대학원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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