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들 말한다. 성폭력이 주로 여성에게만 일어나는 일이라고. 하지만 성폭력은 특정 성별에 국한되지 않는다. 5·18 민주화운동 때, 계엄군과 경찰이라는 ‘국가폭력’은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에게도 성폭력을 자행했다. 그 당시 우리 사회는 지금보다 가부장제가 더 심했다. 지조와 절개라는 여자다움을 강요받은 여성은 군경에게 성폭력을 당하고도 쉽게 말할 수 없었다. 반대로 강인함과 우월함 등의 남자다움을 요구받은 남성들도 계엄군에 성폭력을 당게 알리지 못했다. <편집자주>
“여자들에 대한 성추행·성폭력뿐만 아니라 남자들에 대한
성희롱·성고문 등도 있었다는 것을 알아주기 바란다”
- 박남선 (2018년 5·18 계엄군 성폭력 공동조사단 보고서 중 일부)

5·18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여성 못지않게 남성도 계엄군에게 성폭력을 당한 사실이 확인됐으나, 제대로 조사가 이뤄지지 않은 점이 드러났다. 앞으로 5·18 남성 성폭력 관련 전면적인 재조사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19일 아주경제가 입수한 ‘5·18 민주화운동 진상규명위원회 보고서’에 따르면, 5·18 진상조사위원회가 약 4년 간의 활동으로 16건의 성폭력 사건을 규명했다.
지난 5·18 관련자 8차 보상 과정에서도 총 29건의 성폭력 피해가 접수됐는데, 이 중 남성 성폭력 사례가 추가로 확인됐다.
아주경제 별도 취재로, 한 형제가 5·18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계엄군에게 성폭력을 당한 사실을 새롭게 확인 할 수 있었다.
동생은 성추행에 그쳤지만, 형은 말과 글로 표현하기 어려운 성고문과 성적 학대 등의 인권유린을 당했다. 한 형제가 계엄군이라는 국가폭력에 노출되고 45년간 어떻게 살았을까. 지난 15일 경기도 안산 A 카페에서 형 박남선 씨(72)를 만났다.
계엄군 “이 새끼 살아 있네”

그 결과, 남선 씨는 1980년 5월 27일 전남도청에서 계엄군에 붙잡힌 뒤 ‘505 보안대’ 지하실로 끌려가 성고문을 당했다. 당시 보안대 허장환 상사는 남선 씨를 ‘시민군 상황실장’이라는 상징성 때문에 같이 끌려온 다른 사람들보다 더 가혹하게 다뤘다. 남선 씨는 강제로 구금되고 풀려날 때까지 약 4개월 동안 성고문뿐만 아니라 물고문과 전기 고문도 당했다.
또 북한 개입설과 공작금 유무를 묻는 등의 허위자백을 강요받았다. 반인권적인 수사 끝에 결국 남선 씨는 내란죄 등의 혐의로 재판에 넘겨져 1·2심에서 사형이 선고됐다. 사형 집행은 당시 시민사회와 종교계의 노력으로 이뤄지지 않았다.
그는 “45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날 성고문했던 허장환 상사의 이름과 얼굴, 계급이 잊히지 않는다”며 “보안대로 끌려가자마자 그가 지하실에서 상의와 하의를 강제로 찢었다. 30cm 정도의 대나무 자(尺)로 성기를 자주 때렸다. 맞아서 신체적 반응을 보이면 ‘이 새끼 살아 있네’라고 하며 다시 성고문을 이어갔다”고 말했다.
이어 “5월에 끌려가 6~8월의 무더위에 같이 끌려온 B 씨와 성적 학대를 당했다”며 “보안대 지하실 밖에서 불개미를 이용해 성고문 당했다. 나무 아래에 발가벗겨진 상태로 둔 채 손을 뒤로 묶고 수천 마리의 불개미가 내 몸을 기어올랐다. 불개미가 턱으로 몸 전체와 남성의 중요 부위를 깨무는데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그동안 보안대 성고문에 대해 제대로 말한 적이 없다. 5·18 진상조사와 여러 언론 취재에서 이 부분을 내게 구체적으로 물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며 “5·18에 그런 일을 겪고도 무엇이 성폭력인지 그때 당시엔 잘 몰랐다. 계엄군이 여성을 성폭력 한 사실에 대해 대다수 사람이 의심하지만, 남성이 그런 일을 겪었을 거라고 많이 생각 못 하는 거 같다”고 했다.

알몸 상태로 조사받고 폭행 당해…“여성은 더 했을 것”
남선 씨의 동생 박남규 씨(69)는 5·18 민주화운동 당시 콜택시 영업 주임으로 일하던 중 27일 광주 금남로 가톨릭 센터 앞에서 계엄군에게 연행된 후 무차별 폭행을 당했다. 그는 31일 헌병대(현 군사경찰)로 넘겨진 후 상무대에서 총 68일 동안 불법 구금 상태로 형처럼 보안대 허장환 상사로부터 온갖 고문과 성적 학대를 당했다.지난 15일 남규 씨는 아주경제에 “당시 상무대는 조선 시대 사극에서 나오는 옥(獄)과 같았는데 알몸 상태로 두들겨 맞았다”며 “조사 과정에서 알몸 상태로 때때로 하의만 입은 채 내내 맞았다. 창피함을 느껴 그동안 말하지 못했다. 당시엔 공포감에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성적 수치심이 들었다”고 말했다.
아울러 “계언군은 같이 끌려온 다른 남성들보다 여성들에게 더했다”며 “당시 조사실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실상은 더 심각했을 거다. 5월만 되면 그때 생각이나 가슴이 벌떡벌떡 뛴다. 트라우마가 됐다”고 강조했다.

5·18 민주화운동 당시 금남로 가톨릭 센터 앞에서 군인에게 맞고 있는 박남규씨. [사진=5·18 기념재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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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n**** 2025-05-19 10:59:38아프고 끔찍한 역사지만 똑바로 마주보고 인정하는 과정을 거쳐야, 다시금 이런 일들이 벌어지지 않을거라고 믿습니다. 책임자들의 처벌도 반드시 필요하구요. 좋은 기사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