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영섭 서울대 공학전문대학원 특임교수]
세계는 지금 AI(인공지능) 패권 시대다. AI가 인류의 사회, 경제, 산업, 과학기술, 안보 등 모든 면을 총체적으로 바꿀 것으로 전망되면서 세계 기술패권 경쟁의 핵심으로 부상하고 있다. 미국과 중국은 물론 독일, 프랑스가 주도하는 EU(유럽연합), 영국, 일본 등 세계 주도국 모두 한결같이 AI 역량 강화에 국가적 총력을 쏟아붓고 있다. 세계적으로 공신력이 있는 AI 역량 평가기관인 영국의 토터스 미디어의 최근 발표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압도적 선두 미국, 미국의 70~80% 수준으로 추격하는 중국에 이어 싱가포르, 영국, 프랑스, 독일, 캐나다와 함께 3위 그룹을 형성하고 있다. 구체적 평가지표로는 6위로 평가되나 3위부터 8위까지의 국가들은 선두권인 미국, 중국과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뒤쳐진 수준으로 순위의 의미가 크지 않은 도토리 키재기식 3위 그룹이다.
그 중에서도 미국의 AI 투자 규모는 압도적이다. 2013년 이후 누적 AI 투자 금액 면에서 650조원으로 압도적 1위이고, 트럼프 행정부 2기를 시작하며 민간 벤처 ‘스타게이트 프로젝트’를 통해 AI 데이터센터 등 AI 인프라에 약 700조원을 투자할 계획이라 발표했다. 중국은 2025년 AI 투자가 130조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되고 2024년부터 2030년까지 2000조원에 가까운 천문학적 투자를 계획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EU도 경쟁적으로 30조원 규모의 AI 인프라 ‘AI기가팩토리 프로젝트’를 위시한 'InvestAI' 이니셔티브에 300조원을 투자하여 AI 혁신을 추진할 계획이다. 프랑스는 EU와 별개로 163조원 규모의 대대적 AI 투자를 계획하고 있다. 문자 그대로 ‘쩐(錢)의 전쟁’이다.
우리나라도 AI 3대 강국을 목표로 AI 투자를 집중 확대하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의 신정부가 출범하며 지난 정부에서 발표한 총 74조원 규모의 민관 투자를 확대하여 2030년까지 100조원 규모의 민관 합작 투자를 통해 고성능 GPU 5만개 확보 등 AI 데이터센터의 대대적 확충을 계획하고 있다. 대통령실에 AI 미래기획 수석비서관을 신설하고 신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과 함께 두 자리 모두 민간기업 AI 전문가를 임명하는 파격적 인사로 AI 강국을 향한 강력한 의지를 표명했다. AI가 세상을 바꾸는 AI 대전환 시대에 시장과 기술에 정통한 기업 전문가를 AI 정책 쌍두마차에 배치한 것은 매우 바람직한 조치다.
우리 신정부의 당면과제는 미국, 중국 등 세계열강들이 국력을 총동원하여 AI 세계패권을 위해 벌이고 있는 ‘쩐(錢)의 전쟁’에서 우리의 살 길을 찾는 일이다. 정면 대결이 무모함은 자명하고 우리나라의 강점과 기회요인을 최대한 살릴 수 있는 묘수풀이가 필요한 국면이다.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이 좋은 교훈이다. 당시 불과 13척의 군함으로 수백 척의 일본 대함대를 맞아 대양에서 싸웠다면 필패했겠지만 울돌목의 좁은 해협으로 끌어들여 세계 해전사에 빛나는 대승을 거둔 것처럼 우리가 잘할 수 있는 강점 분야에서 AI 전략을 구사하면 승산이 있다.
우리나라의 AI 전략을 명량대첩의 사례에 비유하면 의미 있는 방향을 도출할 수 있다. 해전의 군함 수는 핵심 AI 반도체인 GPU(그래픽처리장치) 수에 비유된다. 우리나라가 보유하고 있는 GPU 수가 5천개에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추산되는 반면 미국의 오픈AI,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메타 등 빅테크 기업들은 회사당 15만개에서 35만개를 보유하여 합치면 백만 개를 훨씬 상회하고 있다. 중국도 미국의 엔비디아 첨단 GPU 수출금지 조치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경로로 미국에 필적하는 GPU를 확보하고 자체 AI 반도체 개발에도 주력하고 있다. 쉽게 말해 5천 군사로 수백만 대군과 겨루는 국면으로 정면대결은 백전백패다. 우리의 선택은 군함이나 군사를 수백 배 늘릴 것인가, 명량대첩처럼 국지적으로 대등한 전력을 확보할 수 있는 지역을 찾는가이다. 전자는 천문학적 투자와 장기간이 소요되어 현실적인 대안이 아니다. 결국 우리가 강점이 있고 반드시 사수해야 하는 전략 분야를 찾아 국력을 집중하는 전략을 찾아야 한다.
이 맥락에서 우리 경제의 핵심이자 근간인 첨단 제조업의 AI 대전환이 국가적으로 최우선 과제다. 첨단 제조업 분야가 바로 우리의 울돌목인 것이다. 해외의존도가 큰 우리 경제에서 수출의 90%가 제조업에서 나오고 있고 반도체, 자동차, 배터리, 로봇, 바이오, 항공, 방산 등 첨단 산업이 모두 제조업이란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미중갈등, 러우전쟁, 중동전쟁 등 심화되는 신냉전 시대에 지정학적 헤게모니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것도 방위산업의 핵심인 첨단 제조업이다. 우리 제조업의 중요성을 국가적으로 재조명하여 글로벌 제조강국의 지위와 경쟁력을 유지하는 데 국가적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이를 위한 가장 효과적 대안이 AI 대전환이라는 사실에 대한 국가적 공감대 조성이 시급하다. 이제 제조업은 끝나고 서비스업을 키워야 한다든가 신산업을 키워야 한다든가 등 다양한 의견은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위험한 주장이다. 우리가 세계 시장에 내놓을 수 있는 서비스업도 제조 기반 서비스업이고 신산업도 첨단 제조업이 기반이다. 미국, 독일, 일본 등 우리가 경쟁하고 있는 제조강국들도 최근 제조업 재무장 및 경쟁력 강화에 주력하고 있는 것도 같은 이유다.
제조 AX라 불리는 제조업 AI 대전환은 산업 분야도 전통 제조업과 첨단 제조업을 망라하고 가치사슬 분야도 생산을 담당하는 공장만이 아니라 상품기획, 디자인, 제품개발, 구매, 판매까지 제조업 전 분야를 대상으로 한다는 점이 매우 중요하다. 제조 AX를 전통 제조업이나 공장 혁신으로 이해하는 우리나라의 일부 그릇된 인식의 전환도 시급하다. 특히, 정치권, 정부 부처 및 기관, 금융계, 언론계, 학계 등 지도층부터 제조 AX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함께 그 중요성 및 시급성에 대한 공감대 조성이 성공의 선결요건이다.
제조 AX의 성공을 위해서는 AI 기술 자체도 중요하나 제조 데이터와 분야별 도메인 노하우 및 지식이 더욱 중요하다. 우리나라가 제조 AX에서 세계 최강으로 도약할 수 있는 이유다. 특히, 제조 AX의 양대 목적 중 하나인 제조 전과정(Lifecycle) 각 기능 및 전체적 생산성 향상과 경쟁력 제고를 위해서는 전과정 제조 데이터 및 도메인 노하우의 체계화, 구조화, 표준화 등 데이터 생태계 구축 작업이 필수적이다. 제조 데이터 생태계 구축 작업은 일반 데이터와 기본적 차이가 있다. 무엇보다도 제품의 성능, 품질, 원가, 납기, 안전성에 직결되기 때문에 AI의 일반적 현상인 ‘환각(Hallucination)’, 다시 말해 오답을 허용할 여지가 없다. 이 때문에 제조 AX는 인간 전문가의 감독 및 검증, 일반적 RAG(검색 증강 생성), XAI(설명가능 AI) 등 다양한 기법을 통해 환각 발생의 최소화에 주력하고 있다. 세계 최대의 산업기술 전시회인 하노버 산업박람회도 올해 제조 AX가 핵심이었는데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법이 많이 제시되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지식그래프(Knowledge Graph)라 불리는 기법이 많은 주목을 받은 것도 제조 AX의 기술적 난이도를 보여주는 사례다. 예를 들어 다양한 제품 설계 및 공정 파라미터들이 제품의 기능이나 품질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데이터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이에 대한 도메인 노하우를 지식그래프로 표현하여 환각 발생을 예방할 수 있다. 자율주행의 경우도 AI가 카메라 이미지 데이터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판단을 돕는 도메인 노하우 기반 알고리즘을 함께 사용하는 하이브리드 방식이 사용되는 것도 같은 이치다. 따라서 제조 AX는 제조업 전체보다 세부 산업에 특화된 소위 버티컬(Vertical) AI로 발전할 전망이어 다양한 제조업 분야에 장기간 축적된 데이터 및 도메인 노하우를 가진 우리나라가 신속히 산업 데이터 생태계를 구축한다면 세계 최강의 제조 AX 국가가 될 수 있다.
주영섭 필자 주요 이력
△미국 펜실베이니아주립대학 산업공학박사 △현대오토넷 대표이사 사장 △대통령 직속 국민경제자문회의 위원 △전 중소기업청장 △한국디지털혁신협회 회장 △서울대 공학전문대학원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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