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달 22일 세계 금융 시장은 미국 와이오밍주의 휴양지 잭슨홀 경제정책 심포지엄에서 기조연설에 나선 제롬 파월 연준 의장에게 쏠려 있었다. 그는 이날 시장의 예상보다 훨씬 비둘기파적인(통화 완화 선호) 발언을 내놓았다.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관세 정책에 따른 인플레이션(물가 상승)은 단기적일 가능성이 높은 반면, 이민 억제 정책으로 인한 고용 악화 위험은 크다고 판단하고 있다고 밝혔다. 세계의 경제 대통령이라고 불리는 연준 의장이 마침내 미국의 경기 둔화를 인정하며 '9월 금리 인하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시사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러한 파월 의장의 발언은 미국의 대내외적 경제 상황, 특히 물가와 고용 지표를 바탕으로 깔고 있지만, 미국의 중앙은행인 연준의 고유권한인 통화정책과 금융규제 정책을 직접 통제하려는 최근 트럼프 행정부의 줄기찬 연준 흔들기와 친(親) 가상화폐 정책과 연계해 분석하지 않을 수 없다.
잭슨 레이크 로지(Jackson Lake Lodge)에서 열리는 잭슨홀 연례 경제정책 심포지엄은 1980년대 초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캔자스시티 연준이 낚시광이었던 폴 볼커 연준 의장을 송어 낚시로 유명한 호수가 있던 잭슨홀로 초청하면서 현재의 위치에서 개최되어 왔다. 올해 잭슨홀 회의장의 분위기는 유난히 긴장감이 넘쳤던 듯하다. 트럼프 행정부의 정치적 압박이 거세졌기 때문이다.
전통 금융 vs 디지털 금융
흥미롭게도 인근 1시간 거리의 잭슨홀 포시즌 호텔에서는 세계 언론의 주목을 끈 또 다른 굵직한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트럼프 대통령의 차남 에릭 트럼프(41) 등 가상자산업계 거물급 인사들이 대거 참가한 와이오밍 블록체인 심포지엄이다. 확대 일로의 디지털 자산 시장 투자전략과 디지털 금융의 미래를 논의하는 자리였다.
에릭 트럼프는 장남인 형 트럼프 주니어(47)와 함께 가상화폐 채굴업체 '아메리칸 비트코인'의 설립자이자 투자가로 글로벌 금융 시스템이 구식이며 가상자산과 블록체인 기술이 곧 이를 뛰어넘을 것이라고 주장해온 인물이다. 최근 트럼프 가문은 가상자산 사업에서 막대한 수익을 올리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가 가상자산 업계에 우호적인 정책을 펼치는 가운데, 대통령 가족이 전례 없이 대규모의 사업 확장에 나서고 있는 것은 공직자 이해충돌 논란을 제기할 뿐 아니라 미국 공공정책 결정의 객관성과 투명성에 먹칠을 하고 있다.
같은 시기 잭슨홀의 두 행사는 가상자산과 전통 금융이 미래 금융의 주도권 싸움에 본격 돌입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블록체인 심포지엄에 참석한 미셸 보먼 연준 부의장은 "미국은 지금 돈과 가치, 금융시스템의 구조 자체를 바라보는 방식에 있어 거대한 지각 변동의 초입에 있다"고 주장했다. 보먼은 이날 함께 블록체인 행사에 참석한 크리스토퍼 월러 연준 이사와 함께 내년 5월 임기가 끝나는 파월 의장의 후임으로 거론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관점에서는, 블록체인 심포지엄이 열린 화려한 포시즌 호텔에 비해 훨씬 소박한 잭슨 레이크 로지에 모인 파월 의장을 비롯한 세계 중앙은행 관계자들과 경제학자들은 그야말로 구시대의 수호자들이며, 그가 전복시키려고 하는 세력으로 간주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연준 이사 해고
파월 의장은 트럼프가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한 이후 금리 인하에 소극적이라며 전례 없는 비난과 공격을 받아왔다. 직접적인 압박이 효과가 없자, 트럼프는 전략을 바꿨다. 바로 7명의 연준 이사회 자리를 대부분 '트럼프의 사람들'로 채우는 것이다.
연준 이사회 구성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바꿔 금리와 금융규제 정책을 직접 통제하려는 의도이다. 금리를 결정하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는 연준 이사들과 지역 연방준비은행(연은) 총재들 5명을 더해 총 12명으로 구성된다. 연은 위원 12명 중에서 뉴욕 총재는 당연직이고 4명이 돌아가면서 FOMC를 구성한다.
현재 이사회에서 2명의 이사(미셸 보먼, 크리스토퍼 월러)가 트럼프가 지명한 인물로 금리 인하 정책에 동조하고 있다. 7명의 이사 중 현재 1석이 공석으로 있고 트럼프가 해임한 리사 쿡 이사에 대한 법적 정당성 공방이 현재 이어지고 있다.
만약 두 사람 모두 친(親)트럼프 인사들로 채워지게 되면 트럼프는 4명의 다수를 확보하게 된다. 이럴 경우 지역 총재들도 트럼프 정책에 우호적인 인물로 교체될 가능성이 크고, 이는 미국 경제정책 패러다임의 근본적 변화를 의미할 수 있다.
파월 의장의 경우, 의장 임기는 내년 5월에 끝나지만 2028년까지 이어지는 별도의 연준 이사 임기를 보유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파월 의장 임기를 앞당겨 후임을 지명할 것으로 보인다. (스콧 베선트 미 재무장관은 27일 폭스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차기 연준 의장 지명 시점에 대해 "가을쯤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압박 속에서도 파월 의장은 잭슨홀 미팅에서 정제된 언어로 미국 경제의 복잡성과 불확실성을 강조했다. 지난달까지 5회 연속 기준금리를 동결하면서 근거로 들었던 관세에 따른 물가 불안정성에 대해서는 "관세 인상으로 인해 일부 품목의 상품 가격이 상승하기 시작했고 소비자 물가에 미치는 영향은 이제 명확하게 드러났다"면서도 "합리적인 기본 시나리오는 그 효과가 상대적으로 단기적이고 일회성 변화에 그치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관세로 인한 물가 상승 압력이 보다 지속적인 인플레이션을 촉발할 수도 있으나 임금과 관련한 고용 시장에 하방 위험이 증가하는 점을 감안하면 그러한 결과는 불가능해 보인다"고 덧붙였다.
파월은 백악관의 금리 인하 압박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연준의 독립성을 재차 강조했다. 그는 "연준 위원들은 데이터와 경제 전망, 위험 균형에 기반해 독립적으로 판단할 것"이라며 "그 원칙에서 절대 벗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의 연설은 예년보다 다소 방어적이고 신중한 톤이 강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리사 쿡 연준 이사는 트럼프의 해고 조치가 법적인 근거가 없다며 사임을 거부하고 있다. 이번 사안이 대법원까지 갈 수 있지만, 트럼프의 쿡 해임은 연준의 미래를 극도의 불확실성으로 몰아넣고 있다. 연방법상 연준 이사는 14년 임기를 보장받으며 대통령이 임의로 해임할 수 없고, '정당한 사유'(for cause)가 있을 경우에만 해임이 가능하다. 지금까지 어떤 대통령도 이를 실제로 집행한 적은 없었다. 대통령이 연준 이사를 해임 대상으로 삼은 것은 1913년 연준 설립 이래 처음이다.
통계청장 해고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1일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7월의 부진한 고용지표가 발표된 직후 이를 총괄하던 통계 책임자인 에리카 맥엔터퍼 노동통계청(BLS) 청장을 전격 해고했다. 미국의 경제통계는 전 세계 경제의 나침반 역할을 해왔다. 월가의 투자자부터 개발도상국의 정책입안자까지, 모든 경제 주체들이 미국 노동통계청의 고용지표와 인플레이션 데이터를 바탕으로 중요한 결정을 내리곤 한다.
이번 해고 사건은 쿡 연준 이사의 해임과 더불어 단순한 인사 조치를 넘어서는 심각한 정치적 경제적 파장을 예고하고 있다. 백악관은 "코로나19 이후 비정상적인 데이터 수정으로 인해 BLS의 정확성과 신뢰성에 의문이 제기됐다"고 해명했지만, 시장은 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실망스러운 고용지표 발표 직후 청장이 해고됐다는 '타이밍의 우연'이 너무나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현재 관심의 초점은 '데이터 조작 가능성' 그 자체보다는, 통계청의 정치적 독립성이 훼손되고 있다는 신호다. 역사는 '정부 통계 조작의 참담한 결과'를 여러 차례 보여줬다. 2004년 그리스는 유로존 가입을 위해 재정적자 수치를 조작했다고 시인했고, 이후 지속된 숫자 조작으로 2010년 경제위기 때 투자자들의 신뢰를 완전히 잃었다. 채권 금리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고, 결국 가혹한 긴축정책과 사회적 혼란이 뒤따랐다.
아르헨티나 역시 마찬가지다. 부정확한 통계로 인해 국제금융시장에서 '신뢰할 수 없는 국가'라는 낙인이 찍혔고, 현재까지도 그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번 잃은 통계의 신뢰성을 회복하는 데는 수십 년이 걸릴 수 있다는 뼈아픈 교훈이다.
세계 최대 경제대국인 미국에서 통계의 신뢰성 훼손은 전 지구적 파장을 불러올 수 있다. 만약 시장이 미국 통계청의 독립성을 의심하기 시작한다면, 연준의 통화정책 결정부터 글로벌 투자 흐름까지 모든 것이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지금 연준은 인플레이션 목표 달성과 경기 안정이라는 이중 과제를 수행함과 동시에, 외부의 정치적 압력으로부터 중앙은행의 독립성과 제도적 신뢰를 지켜야 하는 매우 도전적인 상황에 놓여있다. 만약 정치적 압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연준은 데이터가 아닌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일 수 있고, 이는 시장의 신뢰 악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올해 잭슨홀 미팅에서 감지된 미묘한 긴장감은 단순한 금리 전망을 넘어, 중앙은행의 독립성이 중대한 기로에 서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더불어 대통령의 정치적 또는 개인적 이해관계에 따라 좌우되고 있는 트럼프호(號)의 각종 경제정책은 뇌관이 언제 터질지 위험천만해 보인다. 단기적인 정치적 이득을 위해 장기적인 경제 신뢰성을 담보로 잡는 것은 결코 현명한 전략이 아니라는 것을 역사는 증명하고 있다.
이수완 필자 주요 이력
▷코리아타임스 기자 ▷로이터통신 선임특파원 ▷로이터통신 편집장 ▷서울외신기자클럽 회장 ▷아주경제 글로벌본부장 ▷아주경제 논설위원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