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요한의 티키타카] 은행 순번 대기표와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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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요한 시사평론가]


지금에야 은행뿐 아니라 주민센터를 비롯해 웬만한 줄서기에는 ‘순번 대기표’가 있다. 도착하는 순서대로 순번 대기표를 뽑고, 얌전히 자리에 앉아 있으면 ‘딩동~’하고 상큼한 종소리가 울리고, 대기표를 들고 창구로 가면 된다.
 
그렇다면 과거에는 어땠을까? 나이가 좀 있으신 독자 제위께서는 기억하실 것이다. 마냥 창구 앞에서 순서가 올 때까지 줄줄이 줄을 섰다. 어쩔 수 없었다. 그것이 방법인 줄 알고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다.

 
60년대 은행 창구 모습 누구든 줄 서서 순서를 기다려야 했다 사진중앙일보
60년대 은행 창구 모습. 누구든 줄 서서 순서를 기다려야 했다. [사진=중앙일보]

이 번호 순번표는 1989년 당시 국민은행에서 처음 도입한 뒤 조흥은행, 외환은행 등 전 은행으로 확산했는데 처음에는 지금과 달리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패널이었다고 한다. 이 제도는 80년대 말 우리나라 국회의원들 몇몇이 서독을 방문했다가 우연히 이 나라의 은행에서 시행하던 ‘번호 순번제’를 보고 국내 도입을 추진했다고 한다. 당시 관계했던 의원의 말이 인상적이다. “민주주의는 정책과 제도다.”
 
민주주의는 정책과 제도
 
87년 6월 항쟁 이전의 대한민국은 정책과 제도는 있었으나 그 정책과 제도가 과연 국리민복(國利民福), 말 그대로 나라의 이익과 국민의 행복을 위하여 존재했는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을 정도로 허술했다. 또 그만큼 국가권력은 강압적이고 폭력적이었다. 제대로 ‘민주주의’라는 단어조차 쓰기 어려울 만큼 우리 사회 자체가 병영화(兵營化) 된 탓이기도 하다.
 
사례 들어보자.
 
87년 6월 항쟁이 결국 노태우 측의 6.29 선언으로 반쪽 승리로 끝났지만, 이후 사회의 변화는 노동 현장에서 태풍으로 몰아쳤다. 1987년 7·8·9 석 달 동안만 해도 1천 100여 개의 노조가 탄생했다. 사회 민주주의의 바람은 그동안 억눌렸던 노동자들의 억울함과 한탄, 한숨과 눈물을 노조로 승화시킨 것이다. 이때 만들어진 노조들을 기반으로 나중에 ‘전노협’과 ‘민주노총’이 꾸려진 것이다. 노동자 스스로 정책과 제도를 만든 사례다.
 
이 상황에서 우스우면서도 가슴 찡한 이야기가 있다. 이 7월~9월 노동자 대투쟁 기간에 가장 격렬하게 시위를 벌인 곳이 바로 ‘울산’이다. 워낙 큰 공장도 많고 그런 공장 하나에 종업원이 2만~3만 명씩이나 되다 보니 시위 자체가 그야말로 ‘세계적’이다. 지게차를 끌고 나오고 탱크보다 힘이 세다는 중장비를 이끌고 나오는, 세계 노동 운동사에 다시 없는 장관을 연출하였다. 물론 이 울산에 노동운동을 하는 그룹들도 많았다. 학생운동 출신이라고 해서 ‘학출’이라 불리는 그룹부터, 현장에서 노동조합을 만들겠다는 그룹까지 각양각색의 활동가들이 있었지만, 이렇게 한꺼번에 노동자들이 작업복을 입고 갑자기 몰려나오는 상황을 감당할 수 없었다. 몇만 명이 모였으니, 선언문이라도 쓰고 요구사항이라고 정리해야 하는데 워낙 갑작스러운 움직임이다 보니 그럴 겨를도 없었다. 그래서 당시 노동자들이 제일 불만스러운 사항을 구호로 쓰자, 라는 의견이 나왔는데, 그래서 채택된 구호가 무엇이었을까? 독재타도? 노동해방? 아니었다. 첫 번째로 나온 구호가 ‘두발 자유화’였다. 그리고 그 다음은 ‘복장 자유화’였다. 몇만 명이 폭발적으로 터져 나와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내면서 힘을 합쳐 나온 구호가 바로 ‘두발 자유화’와 ‘복장 자유화’라니...
 
당시 울산의 현대그룹 계열의 운영 시스템은 군대 시스템이었다. 직원들이 출근할 때 직원들의 두발을 검사하고 복장을 단속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회사의 경비들이었다. 이 자리는 아무나 가는 자리가 아니었다. 보안대나 헌병대 중사, 상사 출신들이 이 자리를 차지했다. 그들이 회사 정문 앞에 딱 버티고 서서 직원들을 마치 졸개 다루듯 두발을 단속하고 복장을 점검했던 것이다. 말을 듣지 않으면 쪼인트를 까고 폭력적으로 다뤘다고 한다.

 
87년 7·8·9 노동자 대투쟁은 노동자가 자신의 언어로 자신의 요구사항을 최초로 주장한 사건이다 사진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87년 7·8·9 노동자 대투쟁은 노동자가 자신의 언어로 자신의 요구사항을 최초로 주장한 사건이다. [사진=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노동자들 입장에서 가장 먼저 생각나는 요구사항이 독재타도나 임금인상도 아니고 바로 두발 자유화와 복장 자유화라는 것은, 자신들의 언어로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최초로 주장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두발이나 복장만 요구하고 거기서 그쳤겠는가? 당연히 터져 나오는 에너지가 그것에만 그치지 않았다. 노동조합을 만들고 노동운동을 하면서 그들의 언어로 그들의 요구사항을 우리 한국 사회에 하나씩 하나씩 청구했다. 그 역사가 오늘에 이른 것이다. 정책을 만든다는 것, 제도를 만든다는 것은 머리 좋은 관료가 이렇게 해주겠다며 시혜로 만드는 것이 결코 아니다. 처절할 정도의 현실에서 눈물로 올라오는 피로 쓴 서약서인 것이다.
 
정책과 제도는 시혜가 아닌 민중의 피로 쓴 서약서
 
이재명 정권이 들어서 여러 정책적·제도적 변화를 꾀하고 있다. 사실 ‘국민주권정부’라는 이름답게, 이재명 정권은 윤석열 검찰 정권 3년의 역사적 왜곡뿐 아니라, 지난 수십 년 동안 보수를 참칭한 수구적 매국 세력, 법과 원칙을 엿가락 휘듯 마음대로 주무른 기득권 세력을 혁파할 의무를 지고 있다. 그렇다면 그 정책적·제도적 변화에 기준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 YS가 금융실명제나 하나회 해치워 버리는 식의 깜짝쇼를 하는 것이 좋을까? DJ가 전국적으로 광케이블을 까는 식의 천재적 혜안에 기대어야 할까?
 
앞서 말한 대로 정책과 제도는 민주의 피로 쓴 서약서인 것처럼 철저히 민중의 이해와 요구에 복무해야 한다. 고(故) 쇠귀 신영복 선생의 서화집은 이렇게 답한다.

 
“높은 곳에서 일할 때의 어려움은 글씨가 바른지 비뚤어졌는지 알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낮은 곳은 있는 사람들에게 부지런히 물어보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높은 곳에서 일할 때의 어려움은 글씨가 바른지 비뚤어졌는지 알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낮은 곳은 있는 사람들에게 부지런히 물어보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다행하게도 현대 IT기술의 발전 덕에 이재명 국민주권 정부는 ‘모두의 광장(https://modu.pcpp.go.kr/)’이라는 플랫폼, 일종의 신문고 제도를 개소했다. 일반 시민들이 다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 그 이전에도 이런 비슷한 제도가 있었겠지만, 12.3 내란을 딛고 국민이 만들어 준 정권인 이재명 정권은 정신을 똑바르게 차려서 국민을 실망시켜서는 안된다. 모르면 국민에게 묻고, 국민을 의지하라. 불평 한마디 하지 않고, 그 길고 긴 은행 창구의 기다란 줄을 참고 견뎌준 국민에게 감사하라.



필자 주요이력 
- 前 정치컨설턴트
- 前 KBS 뉴스애널리스트
- 現 경제민주화 네트워크 자문위원
- 現 최요한콘텐츠제작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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