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학기술이 한국과 베트남 양국 관계의 중심축으로 부상하면서 기존의 무역·투자 중심 협력 구조에 근본적인 전환이 시작됐다. 양국 정상이 과학기술 협력을 공동성명에 명시하면서 전략 산업 분야의 공동 연구와 혁신 생태계 구축이 본격화되고 있다. 이 협력이 단순한 선언에 그치지 않고 제도화와 민관 연계를 통해 실질적 성과로 이어질 수 있을지 주목된다.
이재명 대통령과 또럼 베트남 공산당 총서기는 지난 11일 열린 정상회담에서 과학기술 협력을 양국 관계의 새로운 축으로 격상하기로 합의했다. 공동성명에는 인공지능(AI)·반도체·소재과학·에너지 등 전략 분야에 대한 공동 연구 추진, 과학기술 인재 양성, 창업 생태계 확대, 베트남-한국 과학기술연구원(VKIST)의 기능 강화 등이 구체적으로 포함됐다.
그동안 양국은 제조업 중심의 협력 관계를 유지해 왔다. 삼성, LG, 현대차 등 한국 주요 기업은 베트남에 생산거점과 연구소를 운영하며 현지 고용과 수출에 큰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이번 공동성명은 기술 주도형 협력 체계로의 전환 가능성을 명확히 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세계지역연구2센터 센터장을 맡고 있는 곽성일 박사는 베트남 매체 뚜오이쩨와의 인터뷰에서 “과학기술이 경제협력과 동등한 수준으로 다뤄지는 것은 기존 무역 중심 구조에서 혁신 중심 구조로 전략적 이동이 일어났다는 신호”라며 “이는 단순한 외교 수사가 아니라 정책 설계 방식의 전환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실행으로 이어지는 협력…NIC·GGGI 협정 체결
앞서 12일 서울에서 열린 한베 경제포럼에서는 기술 협력의 실행력을 뒷받침할 구체적 조치들이 이어졌다. 포럼에는 또럼 서기장과 김민석 국무총리가 공동 참석했고 베트남 국가혁신센터(NIC), 한국의 벤처투자사 넥스트랜스(Nextrans), 국제기구 글로벌녹색성장기구(GGGI)가 전략적 협력 협정을 체결했다. NIC는 이 협정을 통해 유망 초기 스타트업을 위한 혁신 펀드 조성, 벤처 자본 접근성 확대, 창업자 대상 글로벌 멘토링·연계 프로그램 추진, 시장 진입을 위한 네트워크 구축을 핵심 목표로 내세웠다.
GGGI와의 협력은 더욱 폭넓은 녹색 전환으로 이어진다. 양 기관은 △수소 산업 생태계 조성 △AI 기반 기후 기술 육성 △녹색 스타트업 지원 △공공-민간 파트너십(PPP)을 통한 자금·기술 협력 △법제도 정비 등 전방위 협력을 진행한다. 특히 GGGI의 Green Transition Lab(GTL)과 NIC 시스템의 통합은 기술 중심 녹색 산업 기반을 확대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또럼 서기장은 이 자리에서 “한국과 함께 과학기술을 기반으로 ‘홍강의 기적(Red River Miracle)’을 실현할 것”이라며 “SK그룹 등 한국 기업의 지원이 베트남의 혁신 생태계 강화에 중대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곽 박사는 기술 협력이 실질적 성과로 이어지기 위해 필요한 조건도 구체적으로 짚었다. 그는 “제도 정비, 공동 사무국 설립, 공동 자금 조성, 정책 시너지 확보, 민간 참여 확대, 인재 양성 프로그램 등이 함께 이뤄져야 한다”며 “조기 성과(quick win)를 통해 신뢰 기반을 확보하고 장기 로드맵을 실현 가능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밝혔다.
또한 베트남이 최근 발표한 ‘68호 결의안’의 실질적 이행 여부가 협력 안정성을 좌우할 수 있다는 점도 강조된다. 이 결의안은 민간 기업 중심의 혁신 생태계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한 정책으로, 외국 기업에 대한 신호로서의 의미도 크다.
양국은 앞으로 공동 개발(Co-development)과 공동 창출(Co-creation) 개념을 확대해 △공급망 회복력 강화 △기술 상용화 촉진 △지식재산권 보호 및 규제 일치 등을 추진할 예정이다. 특히 AI·반도체·수소기술·기후 대응 기술 등 고위험 고수익 분야에서의 협력이 강조되며, 이는 글로벌 시장에서 공동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적 접근이다.
한편, 이번 협력 구상이 실제 정책과 예산, 민간 기업의 실행력과 연결될 수 있을지 여부가 관건이다. 정상회담을 통해 제시된 비전이 구체적 프로젝트로 실현되기까지는 다층적 조율과 구조적 지원이 필요하다. 한·베 과학기술 협력의 미래는 이러한 선언이 실제 변화로 이어질 수 있는 지에 달려 있을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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